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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까기 기계’에 몰린 한국과 삼성전자[송승섭의 금융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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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앞서가고 中 추격…격동의 1990년대
주요국 패권 경쟁에 또 '넛 크래커' 신세

‘호두까기 기계’에 몰린 한국과 삼성전자[송승섭의 금융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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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우리 반도체 기업을 부르는 별명이 있다면 뭘까요? 아마도 ‘넛 크래커’일겁니다. 일상에서 쓰지 않는 말이라 생소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어려운 경제용어는 아닙니다. 딱딱한 호두(nut·넛)를 부수는 기계(cracker·크래커)라는 뜻이죠. 어쩌다 호두까기 기계가 우리 별명이 됐을까요?


넛 크래커란 선발주자와 비교하면 기술경쟁력에서 밀리고, 후발주자와 비교하면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도저도 아닌 위치에 있다면 당연히 선·후발주자 양쪽으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고 무너지게 됩니다. 마치 단단해 보이는 호두가 넛 크래커를 이용해 세게 누르면 부서지는 것처럼요.


日 앞서가고 中 따라오던 1990년대
‘호두까기 기계’에 몰린 한국과 삼성전자[송승섭의 금융라이트] 1997년 미국 유명 컨설팅업체 ‘부즈 앨런&해밀턴’이 발표한 보고서 ‘21세기를 향한 한국경제의 재도약’ 출간본.

한국에 넛 크래커라는 별명이 처음 붙은 때는 1997년입니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가 터지기 직전이었죠. 미국에 유명한 컨설팅업체 ‘부즈 앨런&해밀턴’이 한국을 분석한 보고서를 냈습니다. 제목은 ‘21세기를 향한 한국경제의 재도약’이었습니다. 보고서는 당시 한국경제의 기적이 끝났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저렴한 가격을 내세운 중국과 우수한 기술을 자랑하는 일본 사이에서 한국이 “넛 크래커에 끼인 호두가 됐다”고 지적해 화제를 모았죠.


실제로 당시 중국은 값싼 노동력과 환율정책을 이용해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1991년 9.3%였던 중국의 성장률은 1992년 14.3%, 1993년 13.9%, 1994년 13.1%로 뛰어올랐습니다. 1994년에는 중국 정부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표방하면서 환율을 달러당 8.7위안으로 33%나 평가절하했습니다. 중국 기업의 수출경쟁력이 강화되면서 세계 시장에 저렴한 중국산 제품이 쏟아져 나왔죠.


‘호두까기 기계’에 몰린 한국과 삼성전자[송승섭의 금융라이트]

1990년대 일본의 기술력은 말할 것도 없이 세계 최강이었습니다. 1980년만 해도 메모리반도체 디램의 선두주자는 미국 기업인 인텔이었는데, 일본 기업들이 추월해버렸죠. 1989년 반도체 시장 순위를 살펴보면 반도체 기업 랭킹 1~3위는 NEC와 도시바, 히타치 순이었습니다. 모두 일본 기업이죠. 1990년 세계 대기업 10위 안에 있는 기업 중 6개는 일본이었고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보고서는 섬뜩한 경고를 내놨습니다. 넛 크래커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한국은 2등 국가로 전락해버릴 수 있다는 지적이었죠. 한국이 살아남으려면 경제구조, 정부역할, 대외관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특정 기업이나 산업을 밀어주는 식의 의사결정 관행을 버리고, 금융자유화, 재정경제원 해체, 자본시장 선진화, 노동개혁을 이룩해야 한다는 해법도 내놨고요.


주요국 패권경쟁에 다시 '넛 크래커' 신세
‘호두까기 기계’에 몰린 한국과 삼성전자[송승섭의 금융라이트]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연구원이 나노종합기술원(NNFC)과 협동연구로 제작한 8인치 반도체 웨이퍼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결과적으로 한국은 넛 크래커 위기를 극복해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의 반도체 기업이 기술패권을 거머쥐었고, IT와 같은 첨단 분야에서 급속한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우려와 달리 가격은 일본보다 저렴하고, 기술은 중국보다 앞서게 됐죠. 그래서 ‘역 넛크래커’ 현상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넛 크래커 위기가 닥쳤다는 분석이 다시 나오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대상은 반도체 기업입니다. 지금 반도체 시장은 파운드리를 중심으로 기업 간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은 반도체 패권을 잡기 위해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고요. 과거에는 우리 반도체 기업이 기술을 개발하고 가격을 낮춰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지금은 주요 강대국들의 ‘자국 우선주의’까지 맞서야 하는 상황인 셈입니다.


‘호두까기 기계’에 몰린 한국과 삼성전자[송승섭의 금융라이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22년 5월 취임 후 첫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는 모습. [이미지출처=연합뉴스]

미국의 경우 노골적으로 자국 반도체 기업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시행된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이 대표적이죠.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 생산보조금과 연구·개발(R&D) 지원금 등을 5년간 527억달러 지원하게 됩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도 만만치 않죠. 중국은 3차 반도체산업육성펀드의 조성에 나섰는데 규모만 35조원이 넘을 전망입니다. 일본은 자국에 공장을 지은 대만 TSMC에 4760억엔을 지원했고, 유럽연합(EU)은 2030년까지 민관이 430억유로(62조원)를 투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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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간 보조금 경쟁이 거세지자 반도체 기업인들은 지난달 26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가진 간담회에서 투자 보조금을 신설해달라고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은 직접 보조금보다는 감세나 인프라 지원 등 간접지원에만 집중하고 있죠. 이에 정부는 지난 27일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제5차 국가첨단전략산업위원회’를 열고 투자 인센티브 추가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편집자주경제와 금융은 어렵습니다. 복잡한 용어와 뒷이야기 때문이죠. 금융라이트는 매주 알기 쉬운 경제·금융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사전지식이 전혀 없어도 술술 읽히는 이야기로 경제·금융에 '불'을 켜드립니다.



세종=송승섭 기자 tmdtjq8506@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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