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류나 화학물질, 마약류도 아닌데 외국인이 중국에 들고 갈 수 없는 물건이 있다. 바로 지구본이다. 표기나 크기도 무관한 '반입 금지' 목록에 올라있다. 기자 역시 2022년 베이징 파견을 위한 국제이사 짐을 싸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초등학생 아들이 아끼던 대형 지구본은 이런 사연으로 바다를 건너오지 못했다.
학습 도구 또는 인테리어 소품 정도로 여겨지는 지구본(지도)을, 중국은 왜 외부로부터 들이지 않을까. 여기엔 영토와 영해를 둘러싼 주변국과의 오랜 대립과 '하나의 중국'이라는 양안 문제가 자리한다. '불편하거나 다른' 사상 유입에 민감한 태도는 외부 세력의 침입을 맹렬히 차단해온 만리장성 서사의 연장선으로 보이기도 한다.
지난달 말 한국인 사업가 정 모 씨가 랴오닝성 선양 타오셴공항에 한 시간가량 붙잡힌 일이 있었는데, 이 역시 같은 배경에서 문제가 됐다. 보안 검색대 세관원들이 그의 트렁크에서 다이어리 하나를 발견했고, 거기에 세계 지도 한 장이 붙어있었던 것이다.
세관원들은 지도에 쓰인 '대만'이라는 굵은 글씨, 제1 도시의 붉은색 표기 등을 문제 삼았다. 대만을 마치 별도의 국가처럼 표기했고, 이는 '하나의 중국'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며 조사를 이유로 그를 억류했다. 한 시간 뒤쯤 정 씨는 풀려났지만, 지도가 다이어리에 붙어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당사자에겐 폭력적 처사였다. 중국 보안 및 검문 요원 특유의 경직된 태도와 강압적 말투가 불러왔을 공포심도 짐작할 만하다.
중국은 남중국해를 두고 주변국과 지금도 빈번한 갈등을 빚고 있으며,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 분쟁도 현재진행형이다. '하나의 중국' 가치에 반한 대만 독립 문제는 미·중 관계에 긴장을 일으킬 정도의 역린이다. 그 민감한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중국은 지구본이나 지도가 한 국가를 둘러싼 영토·영해에 대한 판단과 행간을 의도적으로 담고 있다고 판단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해본다. 중국은 왜 자국에서 판매하는 지구본에는 '동해' 표기를 하지 않나. 이것이 동해 표기에 대한 중국의 판단이고, 한국 영해를 대하는 중국의 태도인가. 중국은 통상 지도에 동중국해를 '동해(EAST CHINA SEA)', 우리 동해를 '일본해(SEA OF JAPAN)'라고 표기한다.
지명이 중복되는 탓이라기엔 설명이 부족하다. 국제수로기구(IHO)는 1974년 결의에서 2개국 이상이 다른 명칭으로 지형물을 공유하면서 단일 지명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각각의 지명 사용(병기)을 권하고 있다. 1977년 유엔지명표준화회의 역시 같은 취지로 합의하지 못한 지형물에는 서로 다른 지명을 병기하는 것을 권고한다.
중국에서 일하게 된 이후 꾸준히 해오는 일이 있다. 지방 곳곳의, 베이징 곳곳의 서점을 틈나는 대로 가는 일이다. 특유의 침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현지의 최신 정서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서점에서 판매하는 지구본을, 특히 대한민국 영토와 동해 부근을 손으로 짚어 살펴본다.
17개월여 동안 30여개의 지구본을 확인했지만, 동해 표기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동해 표기는 독도, 고구려사 문제와 함께 우리 외교부가 손꼽는 주요 영토·해양 이슈다. 우리 외교부와 주중 대사관 역시 이 문제와 관련해 항의할 것은 항의하고, 새로 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논의해야 한다.
베이징=김현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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