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일지를 써야 한다.” 유준상은 대학교 1학년 연기 수업 때 들은 스승의 한마디에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연기 수업에 관한 짧은 코멘트부터 배우라는 직업에 관한 철학·두려움·행복, 무대 위 단상, 일상과 여행에서 얻은 통찰 등을 담았다. 2015년부터 지금까지 써온 1500매에 달하는 배우일지를 추려 '배우 유준상'을 잘 드러내는 글을 모았다.
뭘까? 새벽에 일어나 미친 듯이 내 마음이 동요하는 이유는? 언제부턴가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는다. 즉 내가 나를 설득하지 못하면 행동할 수 없다. 평상시 삶의 태도가 연기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내가 설득되지 않으면 연기를 할 수 없다. 그것이 나의 연기 방식을 생성했다. 아름답고 괴로운 고백들은 예민하지만 탄탄한 알맹이를 만들어낸다. 허투루 쓰지 않는 눈빛, 말투, 몸짓…. 나를 괴롭게 하지만 동시에 나를, 나의 연기를 살게 한다. - 「내가 만들어지는 방식」 중에서
일지 쓰기는 단순히 일이 년에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눈도 잘 안 보이고 허리도 더 아프고 무릎도 안 좋아졌지만 일지 쓰기와 반복 훈련이 나의 살 길이라는 생각은 더 분명해졌다. 일지를 쓰지 않았다면 내 삶에 이토록 선명하게 각인되지는 않았으리라. - 「삶과 연기는 같이 간다」 중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하는 사람을 보면 그의 삶이 궁금해진다. 결국 삶과 연기는 같이 가는 것이기에 좋은 생각을 하며 잘 살아야 연기에도 그것이 잘 묻어나온다. 그렇기에 연기는 나를 돌아보게 하고, 스스로를 깨게 하고, 깨려고 해도 깨어지지 않는 나를 다시 발견하게 하고, 그렇지만 또 끊임없이 깨려고 노력하게 하는 작업이다. - 「삶과 연기는 같이 간다」 중에서
뮤지컬 〈로빈훗〉 공연 중에 무술씬에서 상대 배우의 칼에 이마를 찍혔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고 연기하면서 계속 피를 닦아냈다. 1막 공연을 어떻게 끝냈는지 모르겠다. 인터미션 시간에 공연장 건물 10층에 있는 성형외과로 달려갔다. 시간이 없어 마취도 안 하고 열 바늘을 꿰맸다. 다시 2막! 노래는 더 잘되고 집중도 더 잘됐다. 무대 위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자유로움이었다. 더 몰입했고 또 다른 힘이 나왔다. 나의 정신력을 다시 한번 강화시킨 순간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공연을 끝냈다. 안도의 한숨과 격려의 함성이 교차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상처는 났지만 또 하나의 좋은 기억이 남았다. - 「또 다른 자유로움」 중에서
오늘 공연 흐름이 참 좋았다. 소리의 훈련이 점점 완성되는 느낌이다. 소리의 운영을 공연을 통해 할 수 있다는 건 중요하다. 끝없는 노력은 어느 순간엔 꼭 보답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높은 곳이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다는 걸 알아야 한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그 순간순간을 즐기는 것.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다. 오후의 시간을 맞이하는 지금, 좋은 햇살이 몸을 감싼다.
- 「즐기는 자가 결국 남는다」 중에서
무대에 그렇게나 많이 서고 연습을 그렇게나 많이 했는데 가사가 가물가물하거나 연습한 것보다 잘 안 될 때는 무섭다. 그보다 무서운 건 세상에 없을 거다. 무대 위는 살벌한 인생의 장이다. 편하게 무대 위를 뛰어다닐 땐 앞으로의 모든 공연이 다 잘될 것 같은 자신감이 넘치고 힘이 차오른다. 그렇지 않은 날을 겪을 땐 얼마나 조마조마한지…. 그럼에도 이겨내야 한다. 나를 꾸짖고 자책하고 수없이 다시 연습해본다. 다른 방법이 없네…. 결국은 나를 컨트롤하고 격려하고 또 해내야 한다. 마음을 크게 먹어야 한다. - 「무대가 인생이다」 중에서
결국은 버텨야 된다. 버텨야 욕도 칭찬도 받을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 버티고 있다는 건 계속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 성과가 없다 해도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면 그건 도태되는 게 아니다. 이미 하고 있는 것 안에서 새로운 생각을 해야 하니까 힘이 들 뿐. 계속 무언가를 하면서 버티고 있다는 건 지금 그 일을 너무 잘하고 있다는 거다. 물론 불안한 마음은 온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그런 마음은 수시로 들이닥친다. 그런데 재밌는 건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불안 때문에 또 살아간다는 거다. 다 똑같다. - 「버티고 있다면 잘하고 있는 것」 중에서
“이제 좀 알 것 같다”고 얘기한 게 수년 전인데 지금도 이제 좀 알 것 같다고 한다. 아마 또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도 이제 좀 알 것 같다고 할 텐데 나는 그것이 내가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본다. 꾸준히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 말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노력이 없으면 아는 것도 없을 테니 이제 좀 알 것 같은 연기와 테니스, 그리고 내 삶을 더 정성껏 만들어 가겠다고, 나를 위해 뛰라고 얘기해본다. 다시 힘내자.
- 「테니스」 중에서
무대는 준비한 만큼 담대함이 주어진다. 매번 이겨내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고통을 주기도 하고 또 다른 신선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고통보다는 신선함이 더 좋지. 그래! 오늘도 그 신선함을 위해 ‘에라, 모르겠다’라는 마음으로 무대에 오른다. - 「비틀쥬스 12회 차」 중에서
무대에 서기 30분 전 숨이 턱 막혀왔다. ‘왜 그러지? 계단을 너무 오르락내리락했나?’ 파이팅 콜이 끝난 뒤 마음의 고요를 찾고자 무대 위 계단에 앉아서 차근차근 오늘의 씬들을 그려보았다. 이 씬을 생각하면 저 씬이 생각나고, 저 씬을 생각하면 또 다른 씬이 생각나기를 여러 번. 드디어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오버추어가 들리고 내 자리에 섰다. 그리고 음악에 몸을 맡겨 춤을 췄다. 막이 열리고 침착하게 완급과 템포를 조절하며 상대 배우들과 합을 주고받고 신나게 공연했다. 1막이 끝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어. 또 해내야지!’라는 마음으로 2막을 시작했다. 즐기면서 또는 가슴 졸이며 2막을 끝냈다. 후련하다.- 「공연일지」 중에서
나를 위해 뛴다 | 유준상 지음 | 수오서재 | 256쪽 | 1만78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