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관계 없는 행인에 범행
묻지마 범죄 배경엔 '사회 구조적 문제'
지난 4월3일 경기도 평택시 아파트단지 놀이터에서 친구와 컵라면을 먹던 초등학생 뒤로 갑자기 10대 남성이 다가와 흉기로 목을 긋고 달아났다. 하루 뒤 붙잡힌 범인은 고등학생으로 피해자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범인은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화가 치밀어 눈에 보인 아이에게 갖고 있던 흉기를 그냥 휘둘렀다"고 진술했다. 전형적인 ‘묻지마 범죄’였다.
지난 21일 벌어진 ‘신림동 흉기난동’ 사건을 비롯해 최근 묻지마 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범행이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빈부격차, 은둔형 외톨이, 고독사 등 사회적 문제와 연결된 범죄라고 지적한다.
목적도, 동기도 불분명한 묻지마 범죄
신림동 흉기난동은 조모씨(33·남)가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는 행인들에게 다짜고짜 달려들어 흉기를 휘두른 사건이다. 조씨는 체포 직전 길가 계단에 걸터앉아 "열심히 살았는데도 안 되더라"고 말했다. 5월26일 부산에서 정유정(23·여)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도 일면식도 없던 피해자를 찾아가 흉기로 110차례 찔러 목숨을 뺏은 사건이다.
묻지마 범죄는 면식이 없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저지르고, 동기도 뚜렷하지 않다. 대신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이나 사회에 대한 불만을 무차별적으로 표출하기 위한 범죄가 대부분이다. 조씨는 범행을 저지른 뒤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고 정유정은 가난한 환경에 은둔형 외톨이였던 것으로 조사됐다. 김도우 경남대 경찰학과 교수는 "상대적 박탈감이 핵심"이라며 "원인이 자신에 있다는 것을 회피하고 사회를 향하면서 점점 고립되다가 범행까지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토오리마 지겐' 문제 겪는 日, 남의 일 아니다
묻지마 범죄가 사회적 문제로 먼저 떠오른 국가는 이웃 나라 일본이다. 일본에서 묻지마 범죄를 ‘지나가던 악마가 저지른 사건’이라는 뜻의 ‘토오리마 지겐(通り魔事件)’이라 부른다. 2008년 도쿄 아키하바라에서 가토 도모히로가 2톤 트럭으로 횡단보도에 있던 사람을 들이받고 행인들을 흉기로 찔러 7명을 살해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올해 3월에도 중학교에 고등학생이 난입해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두른 사건이 발생했다.
토오리마 지겐에는 일본의 사회 구조적 문제가 깔려 있다. 버블 경제가 꺼지면서 빈부격차,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고독사와 같은 문제가 일본 사회에 떠올랐다. 가토 역시 실업 등으로 생활이 불안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교수는 "한국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고 말했다. 국무조정실의 지난해 청년 삶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은둔형 외톨이 청년은 30만~40만명으로 추정된다. 고독사는 연평균 8.8%씩 증가해 지난해 3378명이 홀로 사망했다. 김 교수는 "이번 범행을 저지른 가해자들은 2030세대로 사회적 안전망에 포함되기 어려운 대상이라 은둔형 외톨이, 빈부격차 같은 문제에 완전히 노출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한국은 분노 사회가 됐다"며 "묻지마 범죄자들의 행태와 특성을 분석해 치안 정책 수립에 반영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공병선 기자 mydill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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