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불교 성지에서 도보 순례중인 정충래 동국대 이사
하루 4만~5만보, 38일간 총 1167㎞ 걸으며 불교중흥 염원
코로나19 3년간 매주 50㎞ 이상 걸으며 체력 길러
"축적된 에너지는 바닥났지만 그간 걸으면서 근기가 붙어 문제 없습니다. 초반에 설사나 감기, 발에 생긴 물집 등으로 고생하던 분들도 이제는 잘 극복하고 낙오없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정충래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이사(65·사진)는 지난달 11일부터 지금까지 꼬박 38일째 인도 동북 지역을 걷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인도 보드가야, 탄생지인 네팔 룸비니, 열반에 든 쿠시나가르 등 불교 성지를 지나 이제 부처가 금강경을 설법했다는 최종 목적지 쉬라바스티를 향해 여정은 막바지에 달했다. 출발 때와 비교해 살이 빠지고 수염도 깍지 못해 얼굴이 수척해졌지만 목소리엔 힘이 넘쳤다. 대한불교조계종 유관단체인 사단법인 상월결사에서 주관한 이번 순례는 승려와 신도, 봉사자, 현지 승려 등을 포함해 약 200명이 38일간 무려 1167㎞, 하루 평균 약 25~30㎞를 걷는 대장정이다. 국내 출입국 일정까지 포함한 총 순례 기간은 43일. 해마다 한국의 여러 불교 종파와 사찰에서 많은 순례객이 인도를 방문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1000㎞가 넘는 일정 대부분을 도보로 진행한 경우는 사실상 처음이다.
부처님 걸었던 길 따라 43일 풍찬노숙
"불가에서는 걸으며 수행하는 것을 '포행(布行)'이라 하는데 '좌선(앉아 수행하는 것)'처럼 일상적인 수행 방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길에서 태어나고, 수행의 길을 나서 득도하셨고, 제자를 기르고 세상에 불법을 가르치기 위해 온 지역을 걸어 다니시다가 마지막 열반도 길 위에서 맞이하셨거든요. 길이란 곧 부처님의 일생이고, 그 길 위에 불법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길과 삶, 걷는 것이 곧 삶의 여정이라고 봅니다."
정 이사가 전해온 인도의 열악한 현지 환경과 긴 순례 일정은 매 순간 쉽지 않아 보였다. 대형 트럭이 오가는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길을 걷기도 하고, 시끄럽고 혼잡한 도심을 통과하거나 가난한 마을의 악취가 나는 시장골목도 지나기도 했다. 치안이 불안한 곳이나 국경 지역에선 경찰과 군부대의 밀착 경호를 받기도 했다. 빨래나 샤워는 호텔 숙소를 이용할 때만 가능했고, 대부분은 야외 텐트에서 노숙을 했다.
기상 시간은 오전 2시. 승려 가사장삼을, 재가자는 행자복을 갖춰 입고 침낭과 텐트를 거둬 다시 짐을 꾸린다. 전날의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채 비좁은 텐트에서 자느라 뻣뻣하게 굳은 몸을 풀어주는 스트레칭 체조를 한 뒤 간단한 아침 예불을 드리고 3시 전에 출발해 걷기 시작한다. 5㎞를 걸을 때마다 한번씩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15㎞ 남짓을 걷고 나서야 비로소 길가에서 소박한 아침을 먹는다. 보통 삶은 달걀 2개, 요구르트, 작은 치즈조각, 과일 한 개 정도라 남길 것도 없고, 남겨서도 안된다. 걷는 동안엔 일절 말을 하거나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도 없다.
이른 새벽부터 7~8시간을 내내 걸어 그날의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전 11시. 대규모 이방인의 행렬이 신기한지 가끔은 마을 주민들이 집앞에 나와 순례단을 바라보다 박수를 쳐 주기도 하고, 마을 대표가 꽃화환을 준비해 목에 걸어주기도 했다. 이렇게 하루 25~30㎞를 걷고 나면 휴대전화 걷기 앱에 4만~5만보가 찍힌다. 점심 후 휴식과 다음날을 위한 정비를 하고 저녁 후 예불의식을 마치면 오후 6시. 해가 진 뒤에는 불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각자 개인 텐트에 들어가 취침 준비를 하고 8시부터 잠이 들었다.
"걷다보면 그 길에서 사는 사람들과 그 길에 주인처럼 있는 삼라만상을 보고 느낄 수 있어요. 차를 타고 스쳐지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흥이 있지요. 돌 하나 풀 한포기도 눈을 맞출 수 있고, 거기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들과도 눈인사로 마음을 소통할 수 있고…"
순례 준비하다 지인들과 걷기 모임도 만들어
동국대부속중학교와 부속 영석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정 이사는 현재 학교법인 동국대 이사로 재직하면서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 상임부회장을 맡고 있다. 2019년 가을 상월선원 승려들과 함께 인도의 불교 성지를 걷는 순례 계획을 세웠지만 곧바로 코로나19가 전세계에 확산하면서 계획은 3년이나 미뤄졌다. 그 사이 '국난극복 자비순례(2020년)' '삼보사찰 천리순례(2021년)' '평화방생순례(2022년)' 등 20여일 이상 진행되는 국내 순례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정 이사는 여기에 빠짐 없이 참가하면서 자연스럽게 걷기를 생활화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걸어 주 50㎞ 이상 걷기를 목표로 하고 오전에 시간을 낼 수 있는 날은 새벽부터 눈 뜨자마자 바로 물 한병을 챙겨들고 나섰어요. 집 근처 올림픽공원과 한강 둔치를 찾아 하루 20㎞를 걷기도 하고, 평일에 목표치를 채우지 못하면 주말에도 나가 계속 걸었지요."
인도 순례를 대비해 훈련도 하고 친구들과 건강한 만남도 유지할 겸 걷기 모임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걷는 기회도 늘려갔다. 혼자서는 단순히 걷기에만 충실할 수 있지만, 친구들과의 걷기는 모임의 주제가 뚜렷해야 모임 횟수도, 참여율도 높일 수 있다는 게 정 이사의 충고다. 그 중 한 모임은 매번 서울 지역구 중 한 곳씩을 정해 걸으며 지역 이해를 겸했는데, 25개 구를 한번 이상 다 둘러 본 후로는 서울 주변 도시로까지 넓혀 모임을 계속 하고 있다. 정 이사는 "고궁과 박물관, 미술관 등을 찾아 가되 그 주변 유명 장소까지 방문하면서 우리 문화예술을 공부하는 모임도 있다"며 "보통 한 번 만나면 3만보 내외를 걸을 수 있어 지인들 반응이 매우 좋다"고 자랑했다.
한달 하고도 열흘간 이어진 이번 인도 순례를 통해 그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정 이사는 "부처님께서 길을 걸으신 이유가 바로 삶의 현장에서 가르침과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였는데, 지금 우리 불교의 모습은 그렇지 못하다"며 "삶의 현장,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불교로 거듭나는 것이 시급한 일임을 다시 한번 자각했다"고 말했다.
한국 시간으로 21일 현지 순례를 마치는 정 이사는 23일 귀국한다. 이후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기 위해 계속 걷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불자로서 순례길을 걷는 내내 이것이 개인적 체험으로 끝나서는 안된다고 다짐했다"며 "나를 돌보는 행선 걷기, 나를 돌아보는 명상 쉬기, 걷기를 통해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보급하는 일에 무언가 봉사할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