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근 방법부터 달라… 익숙한 단어 찾는 아이들
[아시아경제 조성필 기자, 공병선 기자, 오규민 기자] 초등학교 1학년생인 이민수군(7·가명)에게 이 문제지를 내밀었다. 이군 엄마가 동참했다. "민수야, 이 글을 다 읽고 나서 '장르'라는 뜻이 뭔지 맞추는 거야. 종류, 가수, 빠르기 중에 저 단어랑 가장 비슷한 게 뭘까?" 이군이 미간을 찡그렸다. “(문제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이군 엄마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사라졌다. “아이가 책을 좋아해서 평소 책을 많이 읽는데…” 엄마는 이군을 향해 "어떤 걸 잘 모르겠냐"며 재차 독려에 나섰다. 소용없었다. 이군은 입을 닫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무언의 포기 선언이었다.
동급생 박재민군(7·가명)에게 같은 문제지를 줬다. 박군은 '②가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유를 물었다. 박군이 배시시 웃으며 “잘 몰라서요”라고 답했다. 미소를 보인 아들과 달리 엄마는 내심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박군 엄마는 눈꼬리를 한껏 올린 채 취재진에 따져 물어왔다. “아이가 하루에 책을 한 권씩 읽어요! 문제가 어려운 게 아닌가요?”
본지가 서울 마포구의 한 초등학교를 찾아 1학년 학생 10명에게 물었다. 결과는 1명이 정답(①종류)을 맞혔다. 상당수 아이가 오답인 ‘②가수’를 골랐다. ②번을 고른 이유는 대개 비슷했다. “‘가수’란 단어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거나, “가수와 연관된 ‘음악’, ‘피아노’ 등 단어가 다른 문장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제 접근 방법이 글을 읽고 이해하려고 하는 데 있지 않고, 단어 등 아는 무엇인가를 찾는 데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단면이었다.
같은 학교 6학년 학생들에게는 위 문제지를 건넸다. 남학생 3명이 먼저 응했다. 이들은 모두 ②번을 골랐다. 최예준군(12·가명)은 “보기 글의 앞부분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강대국들은 그들의 뜻대로 국경선을 바꿔 그렸습니다’란 문장이 나와서 골랐다”고 답했다. 나머지 두 학생은 ‘강대국’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와서 ②번을 택했다고 했다. 여학생 4명에게도 같은 문제지를 보여줬다. 4명 가운데 3명이 정답인 ①번을 골랐다. 이예진양(12·가명)만 홀로 ②번이라고 했다. 이양은 “'강대국들에 의해 국경선이 바뀌어 그려졌다'는 얘기가 앞에 나와서 그 뒤 문제가 벌어졌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교육현장서도, 통계도 말한다… 문해력 저하 '심각'
세계 최저 수준의 문맹률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어느 순간부터 문해력 저하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글을 읽는 건 세계 어느 나라와 견줘도 부족함 없지만, 그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단 것이다. 최근에는 한 웹툰 작가 사인회 사전 신청 과정에서 시스템 오류가 발생하자 주최 측이 사용한 '심심한 사과' 표현 해석을 놓고 심각성이 다시 한번 수면 위로 오르기도 했다. 일부 시민이 '심심(甚深)한'을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의미의 동음이의어 '심심한'으로 오해하면서 비롯됐다.
문해력 저하 현상은 우리 사회 미래라 할 수 있는 어린이, 나아가 10대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특히 악화하고 있다. 경기도의 한 중학교 영어 교사인 이모씨는 "중3 학생들이 '문맥'이라는 단어를 몰라 시험시간에 의미를 묻는 질문을 하기에 이른 수준"이라며 "이런 친구들은 보통 수업 시간에도 수시로 자리를 옮긴다든지,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수업에 관심을 갖지 못한다"고 했다. 학업 현장에서는 아이들의 문해력 저하 현상이 정상적인 수업에 지장을 줄 정도에 이르렀다고 입을 모은다.
이런 문해력 저하 현상은 학력조사 결과로 나타났다. 지난해 교육부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고교 2학년의 국어과 보통학력 이상 비율은 64.3%에 그쳤다. 2019년 77.5%였던 게 2년 만에 13.2%포인트 하락했다. 중학교 3학년 역시 같은 기간 82.9%에서 74.4%로 줄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관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도 확인된다. 우리 학생들의 읽기 영역 평균 학업성취도는 2009년 539.79점에서 2018년 514.05점으로, 근 10년 새 무려 25.74점이나 낮아졌다.
노인도 취약계층… 초교 1~2학년 수준이 14%
노년층도 10대와 아울러 문해력 취약 계층으로 꼽힌다. 작년 8월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발표한 '성인문해능력조사 결과'에 따르면 60세 이상 노인의 14.2%가 '수준 1'에 해당하는 비문해 인구로 분류됐다. 60세 미만 성인 인구 0.8%가 수준 1로 추산된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높은 수치인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구체적 연령대별로 살펴보면 60~69세 5.3%, 70~79세 13.7%, 80세 이상 49.3%가 수준 1로 집계됐다. 수준 1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 읽기, 쓰기, 셈하기가 불가능할 때 부여된다. 보통 초등학교 1~2학년 학습이 필요한 수준으로 본다.
본지가 만난 60대 노년층도 이 같은 통계 수치 범위 안에 속했다. 6학년 학생들에게 낸 문제지를 건네본 결과다. 김옥순씨(68·가명)는 문제지를 접하자마자 "어휴, 길다"며 손을 내젓기부터 했다. 김씨는 결국 오답을 골랐다. ③번을 가리킨 그는 "최근 물가, 가뭄 등 상황을 생각하며 문제를 풀었다"라고 했다. 전이수씨(67·가명)도 정답을 피해 갔다. 전씨는 "우리나라처럼 강대국의 횡포로 고초를 겪어서 ②번을 골랐다"고 했다. 그들에게는 초등학생 6학년생 수준의 해당 문제지가 읽기에도, 이해하기도 너무 벅찼던 셈이다.
조성필 기자 gatozz@asiae.co.kr
공병선 기자 mydillon@asiae.co.kr
오규민 기자 moh01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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