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료 부족한데 왕복운항·곡예운전, 日 자위대 민간항공기 위협…
사실성 높이는 연출 고집하고도 비현실적 이야기에 집중도 추락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김남길, 임시완…. 충무로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의기투합했지만, 티켓 파워는 기대에 못 미친다. 영화 ‘비상선언’ 이야기다. 지난 9일까지 157만9230명을 모으는 데 그쳤다. 개개인의 연기에 문제는 없다. 공간 분리 등으로 호흡을 맞출 여지는 부족하지만, 형사·부기장·국토교통부 장관 등의 직업의식을 잘 보여준다.
항공기를 테러하는 진석(임시완)의 행동 하나하나도 적절한 긴장을 조성한다. 항공기가 360도로 회전하거나 수직에 가깝게 낙하하는 등 박진감 넘치는 장면도 제법 있다. 테러 액션물이나 밀실 스릴러는 아니다. 한재림 감독은 ‘재난영화’라고 규정했다. "진석은 재난의 상징과 같다. 쓰나미처럼 한순간 밀어닥쳤다가 사라진다. 뜻밖의 고난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살피며 대처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한 감독은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인물보다 배경에 조명을 주고 영상의 질감을 뭉갰다. 헐레이션(강한 빛이 필름 등에 닿았을 때 그 면에서 반사된 빛이 다시 유제에 닿아 감광되는 현상)이 일어나도 개의치 않았다. 배역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핸드헬드(카메라를 손으로 들고 촬영하는 기법)를 사용해 실제 있었던 사건을 담은 듯한 느낌을 부여했다.
의도가 온전히 전달되는 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야기의 뼈대가 앙상해 현실감이 떨어진다. 배경은 호놀룰루행 항공기 KI501편. 진석은 겨드랑이 피부 속에 숨겨온 하얀 가루(MH-1)를 분사해 항공기를 순식간에 바이러스 배양실로 만든다. 탑승객이 하나둘씩 죽어가고 연료마저 동나자 부기장 현수(김남길)는 ‘비상선언’을 선포한다.
한 감독은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팬데믹으로 허구가 아님이 입증됐다"라고 밝혔다. KI501편이 서울공항 주변을 맴도는 가운데 착륙을 반대하는 시위대가 운집한 장면을 가리키며 "이병헌이 시나리오를 읽고 과장됐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를 비난하기보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자성하고 발전한 인류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설명대로 ‘비상선언’에는 세월호 침몰 사고, 코로나19 확산 등 각종 재난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많이 있다. 그러나 정작 이야기는 놀라울 만큼 허구에 가깝다. KI501편은 하와이 상공에 진입하나 착륙 금지를 명령받고 인천으로 회항한다. 실제로 호놀룰루를 왕복할 만큼 연료를 넣고 운행하는 항공기는 전무하다. KI501편이 기장의 사망으로 이리저리 뒤집히거나 꺾이는 장면도 비현실적이다. 자동으로 가동범위가 제한돼 비슷한 사태가 일어날 수 없다.
기장과 부기장은 어떤 상황에서도 조종실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현수는 아무렇지 않게 객실을 방문하고, 진석을 감금해 심문까지 한다. 도쿄 상공에서 자위대 전투기는 기수를 틀지 않는다는 이유로 KI501편에 위협 사격을 가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항공기가 민가로 추락해 자국민의 피해가 발생해도 괜찮다는 연출이 더해져 헛웃음을 일으킨다.
문제는 제목으로 채택한 비상선언(emergency declaration)에서도 나타난다. 비상선언은 재난 상황에 직면한 항공기가 정상적인 운항이 불가능해 ‘무조건적 착륙’을 요청하는, 기장이 선고하는 일종의 비상계엄. 이유를 불문하고 착륙에 우선권이 부여된다. 연료까지 바닥난 KI501편은 관제탑의 지시를 무시하고 착륙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도한 나라의 정부는 항공기 문을 폐쇄하고 우리 정부와 해결책을 모색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미국과 일본은 인도적 차원의 지원은커녕 국제적 문제로 일을 키운다.
비현실적 이야기 앞에서 사실적 접근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한 감독은 중후반부터 의도적으로 장르적 재미와 긴장을 낮추고 문제의식만 부각해 집중도가 떨어지는 역효과까지 일으킨다. 이 영화에는 관객을 이끄는 배역도 인호(송강호)밖에 없다. 나머지는 입체성은 고사하고 쓸데없는 전사만 드문드문 배치됐을 뿐이다. 애초 목표가 탑승객들을 통해 재난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유명하지 않은 배우들을 섭외하는 편이 나았을 수 있다. 장조림을 요리하는 데 ‘한우++’를 사용할 필요는 없을 테니.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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