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랑아를 보기 싫었던 사회가 만든 선감학원
노동 착취·폭력에 노출 당한 아동들
국가폭력 인정하면서도…피해 회복은 감감무소식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 초반 안산 선감도에 설립된 이후 1982년까지 운영된 시설로 8∼18세 아동·청소년들을 강제 입소시켜 인권을 유린한 수용소다. 경기도가 공식사과와 함께 피해자에 대한 지원대책 마련을 준비 중이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피해원인과 규모 등의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아시아경제는 지금도 고통 받고 있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전달하고 국가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한 대책과 피해자 지원 방안 등을 다룬다. <편집자주>
[아시아경제 공병선 기자]선감학원은 아동에 대한 혐오로 점철된 곳이다. 1942년 4월 일제는 도시 빈민으로 전락한 부랑아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이들을 교화하기 위해 경기 안산에 선감학원을 만들었다. 교화가 목적이라곤 내걸었지만 사실상 식민지배 사상을 주입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선감학원은 계속 운영됐다.
1946년 2월 경기도가 선감학원 운영을 맡게 됐고 부랑아였던 아동들을 데려와 감금하고 노동을 착취했다. 오히려 1954년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아동들을 가둬놓을 채비도 갖추었다. 이때부터 책임은 경기도에 있었다. 하지만 거리에서 부랑아를 보기 싫어했던 당시 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인 결과물이기도 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경기도와 서울시, 인천시 등은 나서서 아이들을 잡아들였지만 시민 사회 그 누구도 거센 반대를 하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조사를 통해 "부랑의 출현 자체는 개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사회의 격변과 경제 붕괴 때문인데 이를 개인적 속성으로 원인을 바꿨다"고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부랑아가 아닌 엉뚱한 아이들이 잡혀가기도 했다. 공무원들에게 선감학원 등 아동수용소에 가두도록 할당을 줬기 때문이다. 당시 공무원들은 빼빼 마르고 지저분해 보이면 가차 없이 잡아들였다. 김영배 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은 "잡혀갈 때만 해도 내가 잘못한 줄 알았다"며 "나중에 공무원들에게 주어진 할당이 있었고 많이 잡아오면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포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선감학원에 수용된 아동 가운데 절반 이상은 보호자 동의 없이 선감학원으로 끌려오게 됐다.
노동 착취·폭력에 힘없이 노출당한 선감학원 아동들
아동들은 선감학원에서 성인조차 견디기 힘든 노동 착취를 당했다. 이들은 새벽까지 교대 근무를 하며 돼지, 누에 등을 길렀다. 선감도의 선착장에 소금이나 쌀 등 무거운 물건이 도착할 때마다 아이들은 줄지어 옮겼다. 이 과정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제공하지도 않아 굶어죽는 경우도 있었다.
폭력도 만연했다. 경기도의회의 자료에 따르면 선감학원 피해자들은 선생님들의 몽둥이 소리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걸으면서 몽둥이를 바닥에 긁을 때마다 또 맞을까봐 밤잠을 설치는 것이다. 선생님뿐만 아니라 아이들끼리도 폭행을 가했다. 굶어 죽을 정도로 각박하고 조직적인 환경이 긴장감을 조성한 것이다. 아이들은 폭력의 대상으로 점찍히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더 잔인하게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종합하자면 과거 군대 문화와 선감학원은 다를 바 없었다.
선감학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아동들은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감학원은 갯벌로 둘러싸인 곳이다. 탈출하던 아동들은 갯벌에 빠져 죽었다. 선감학원 아동들은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은 아이들의 시체가 물에 떠밀려 오면 옮겨서 묻기도 했다. 탈출에 성공해도 문제였다. 당시 이 지역 주민들은 선감학원 아동들의 처지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아동들을 잡아 집에서 일하지 않으면 선감학원에 다시 돌려보내겠다고 협박했다. 아동들은 다시 선감학원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지역 주민의 집에서 대가 없이 노동력을 제공했다.
공병선 기자 mydill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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