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아들'·'서편제'·'취화선'…태흥영화사 이태원 前 대표
임권택 作 '하류인생' 실제 모델…한국영화 부흥·세계화 주역
전주영화제는 회고전, 한국영화박물관은 '위대한 유산' 전시
자료로 보는 한 편의 영화…미완성작 '비구니' 복원영상 상영도
한국영화는 1984년 자유를 되찾았다. 정권에 반대하거나 정치·사회 색채가 짙은 영화를 규제하던 이른바 ‘유신 영화법’이 종언을 고했다. 제약이 사라지자 제작사는 우후죽순 싹텄다. 2000년대 중반까지 250여 곳이 늘었다. 급속한 성장의 중심에는 태흥영화사가 있었다. ‘장군의 아들(1990)’·‘서편제(1993)’로 한국영화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고, ‘화엄경(1993)’·‘춘향뎐(2000)’·‘취화선(2002)’으로 세계 3대 국제영화제에 진출했다.
찬란한 성과는 지난해 10월 이태원 전 대표의 별세로 재조명되고 있다. 오는 28일 개막하는 전주국제영화제는 태흥영화 회고전을 한다. ‘취화선’, ‘세기말(1999)’, ‘금홍아 금홍아(1995)’ 등 여덟 편을 상영해 1980~90년대 한국영화사를 돌아본다. 문석 프로그래머는 "태흥영화사는 암흑기에 놓였던 한국영화계를 견인하고 나아가 세계화에 일조했다"며 "이 전 대표를 추모하고 한국영화계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기리고자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 발자취는 한국영화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9월 25일까지 기획전시 ‘위대한 유산: 태흥영화 1984~2004’를 한다. 태흥영화사의 고난과 영광이 고스란히 담긴 자료 여든다섯 점을 최초로 공개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이 태흥영화사로부터 넘겨받은 2179점 가운데 희소성이 높다고 평가되는 기증품들이다. 태흥영화사는 영상자료원이 특수법인으로 출범하기 이전인 1985년부터 스물다섯 차례에 걸쳐 자료를 기증했다. 그 양은 한남동 사옥을 매각하고 신당동으로 이전한 2018년에만 2.5t에 달했다.
이번 전시는 자료로 보는 한 편의 영화 같다. 제작되고 상영되는 과정에 스며든 다양한 노력이 맥락화 돼 있다. 제작, 배급, 홍보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당시 상황을 엿보며 영화를 세부적으로 들여다보게 한다. ‘취화선’의 경우 오픈세트 설치 관련 서류가 그렇다. 태흥영화사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운영한 남양주종합촬영소에 발송한 공문이다. 촬영을 마치면 기증하겠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 세트는 MBC미술센터에서 만들었다. 기와집 스물여섯 채, 초가집 서른한 채, 주막, 골목길 등으로 19세기 말 서울 종로의 풍경을 재현했다. 정일성 촬영감독의 조언에 따라 인물과 카메라의 동선을 고려하고 지어 사극 프로덕션 디자인 팀들이 선호한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종합촬영소 운영권을 넘겨받은 부영그룹이 보수를 미루고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
전시실에는 미완성된 영화의 복원 영상과 오리지널 시나리오도 있다. 태흥영화사의 창립 작품이 될 뻔했던 임권택 감독의 ‘비구니’가 대표적이다. 1984년 4월 배우 김지미의 삭발 의식을 시작으로 촬영에 돌입했으나 조계종에서 강하게 반발했다. 불교를 모독할 우려가 있다며 문화공보부에 제작중지 요청 공문을 보냈다. 임 감독과 송길한 작가가 대본을 수정했으나 불교의 성역을 건드리는 표현 자체를 반대했다. 주인공 수경이 비구니로 입산해 속세에서의 사랑을 회상하고, 한국전쟁 중에 고아들을 피난시키려고 트럭운전사에게 몸을 허락하는 장면 등이다. 제작중지 궐기대회를 열고 법원에 제작 중단 가처분 신청까지 내 촬영이 무산됐다.
훗날 송 작가는 "세속적 집착과 번뇌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이야기"라며 "중생과 더불어 밝음을 지향하는 대승적 수행을 그리고자 했을 뿐"이라고 회고했다. 임 감독도 "전쟁 장면은 내가 이제까지 촬영한 것 중에 가장 힘 있게 찍혔는데…"라며 아쉬워했다. 촬영된 약 20% 분량의 16㎜ 필름은 2014년 태흥영화사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의 송길한 작가 특별전을 계기로 디지털 복원돼 대중에 공개됐다. 수경의 입산, 삭발 의식, 전쟁·피난 풍경 등이다. 백미는 수경이 괴로움과 번민을 떨치려고 엄동설한에 알몸으로 물에 뛰어드는 신이다. 음향이나 영화적 효과가 없어도 몸을 부들부들 떨며 기도하는 모습에서 비상한 각오가 전해진다.
미완성 영화 자료와 관련 일화를 접하고 나면 태흥영화사의 뚜렷한 성과는 일부에 불과하다고 여겨진다. 모든 발자취에는 이 전 대표의 헌신이 있었다. ‘컨테이너’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분주하게 활동하며 영화 서른여섯 편을 제작했다. 신진 감독을 발굴하고 세계화의 초석을 닦으며 한국영화의 변화와 도약을 견인했다. 그는 직배 영화 개봉을 앞두고 서울극장과 합동영화 설립자인 고(故) 곽정환 대표와 신경전을 벌인 일화로도 유명하다.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대위 기자회견에선 일수 유지를 주장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정종화 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은 "이 전 대표가 이끈 태흥영화사는 한국영화의 자존심이자 한국영화 발전을 추동하는 심장이었다"고 평가했다.
진취적 삶은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2004)’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전 대표는 주인공 최태웅(조승우)의 실제 모델이다. 젊은 시절 서울 명동 주먹조직에 몸담은 자신의 삶을 극화했다. 이 전 대표는 이후 영화 제작에서 손을 뗐다. 과거 행사장에서 이유를 묻자 "이제 나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했다. 영원한 안녕은 아니다. 그가 마련한 발판 위에서 오늘도 후배들은 세계를 휩쓸고 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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