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럽에서 일고 있는 사악한 추세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비자유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다. 국민의 기본권이 심각하게 제약 받는 비자유 민주주의 정권의 권력은 으레 1인에게 집중된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대표적인 예다.
이들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TVㆍ라디오ㆍ신문 같은 전통 매체에 대한 장악력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인기를 이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 지도자가 반(反)서방 성향에도 이른바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sensus)'를 따랐다는 점이다. 냉전시대 붕괴 이후 미국 행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의 정책결정자들 사이에서 '위기에 처한 국가', '체제 이행 중인 국가'에 미국식 시장경제를 이식하자는 합의가 이뤄졌다.
푸틴 치하의 러시아는 예산흑자를 유지하고 방대한 양의 외환을 축적했다. 오르반 치하의 헝가리, 에르도안이 이끄는 터키 역시 빈틈 없는 재정정책을 펼쳤다.
치밀한 거시경제 정책은 양호한 성과로 이어지고 거시경제 관리는 정치인 아닌 전문가에게 맡겨졌다. 이들 비자유 민주주의 정권의 지도자는 자기들 인기를 끌어올린답시고 단기적인 재정 혹은 통화 부양책에 의존하진 않았다. 베네수엘라의 고(故)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과 달랐던 것이다.
유럽의 비자유 민주주의 정권 지도자들은 재정 과다 지출로 금융위기가 도래하고 국제통화기금(IMF)에 손 벌리는 지경까지 이르면 권력이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잘 안다.
치밀한 거시경제 정책은 성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는 경제의 자유가 유지될 때 가능하다.
비자유 민주주의 스트롱맨들의 장기 과제는 경제적 자유를 유지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은 경제 통제권의 상당 부분을 측근이나 가족에게 넘기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면 부패가 확산할 것은 당연하다. 성장세는 꺾이게 마련이다.
이런 위험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나라가 러시아다. 푸틴이 권좌에 오른 것은 유가가 오르기 시작할 때다. 원자재 가격이 고공비행할 때 러시아 경제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러나 원자재 슈퍼사이클이 종료된 지 약 3년이나 지난 지금 러시아의 앞날은 암울하기 이를 데 없다. 생활수준이 정체되고 올해 경제성장률은 1.4%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대로라면 러시아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가난해질 것이다.
에르도안이 이끄는 집권 정의개발당(AKP)은 극심한 금융위기에서 벗어나고 있는 경제, 실제 잠재성장력이 강한 경제를 물려받았다. 이는 도시화와 터키 국민들의 높은 교육수준 덕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터키 정부는 조달 및 인프라 재정지출 같은 내수 부문에 대한 개입을 자제했다. 그러나 지난해 군사쿠데타 실패 이후 정부는 거사 주범으로 지목한 재미 이슬람학자 펫훌라흐 귈렌 추종 세력이 운영하는 기업들을 장악해왔다.
이미 수백개 기업이 에르도안 측근들 손으로 넘어갔다. 이런 일이 지속될 경우 기업인은 투자를 중단하고 경제성장은 불투명해질 것이다.
문제는 비자유 민주주의 정권이 일단 이런 길로 들어서면 아무리 재산권을 존중한다고 역설해봐야 신뢰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립 사법부, 전문 행정조직처럼 자유 민주주의를 보장할 기관들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럽의 스트롱맨들이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는 것은 장기 재산권이 걸려 있는 경제적 자유를 그나마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정권이 점차 권위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면 과연 앞으로 유권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나 있을지 의구심만 커질 것이다.
다니엘 그로스 유럽 정책연구센터(CEPS) 소장, 전 유럽의회 경제 전문 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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