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다"
화려한 장식과 色, 도움 안돼
무색투명하며 볼이 넓고 입구가 좁은 튤립모양이 적당
"그렇다"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서 맛 변하는 것이 바로 와인
고급와인에 고급 글라스면 더 좋은 맛 느껴질수도
[아시아경제]엘리자베스 1세가 평생을 처녀로 지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동안 어찌 남자들의 유혹이 없었을까. 언젠가부터 여왕을 사모하는 장군이 자꾸 치근대는지라, 어느 날 저녁 여왕은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장군이 설레는 마음으로 여왕을 기다리고 있는데 화사하게 차려입은 여왕이 금 쟁반에 사과를 깎아서 가져오더니 잠깐 사과를 들며 기다리라고 했다.
사과를 다 먹고 나니까 여왕은 이번에는 은쟁반에 사과를 가져와서 들라고 하고 또 사라져버렸다. 장군은 바쁜 일이 있나 보다 생각하고 사과를 먹어치웠다. 한참을 기다리니 이번에는 여왕이 구리쟁반에 사과를 가져와선 좀 더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사과를 대접받으려고 온 건 아닌데…." 장군은 투덜대면서도 왕의 명령인지라 사과를 먹으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연거푸 사과를 세 접시나 먹고 한참을 기다리면서 인내의 한계를 느낄 무렵 드디어 여왕이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여왕은 "어느 쟁반의 사과가 가장 맛있던가요?"라고 물었다.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면서 여왕을 기다리다 지친 장군에게 사과는 관심 밖이었다. "사과야 어느 것이나 맛이 똑같지요." 장군은 약간 신경질적으로 이야기했다. 이에 여왕은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고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금쟁반에 있는 사과나 은쟁반에 있는 사과나 맛이 똑같은 것처럼 여자도 왕이든 평범한 여인이든 별다를 것이 없다는 얘기다. 장군이 금쟁반에 있는 사과가 가장 맛있더라고 얘기했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와인 글라스도 마찬가지다. 값비싼 고급 글라스에 든 와인이 더 맛있는 것은 아니다. 기왕이면 비싼 글라스가 더 좋긴 하겠지만 비싼 글라스가 와인의 맛을 더 좋게 만들지는 않는다. 크리스털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와인 글라스는 무색투명하면서 볼이 넓고 입구가 좁은 튤립 모양, 즉 계란을 위에서 3분의 1 정도 자른 듯한 모양이면 된다. 색깔이나 무늬가 있으면 와인의 색깔을 보는 데 방해를 받고, 입구가 좁아야 와인의 향이 밖으로 분산되지 않는다. 결혼 선물로 받은 조잡한 와인 글라스는 선반에 있을 때는 화려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와인 마시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와인 글라스의 크기다. 와인 글라스에는 어느 정도의 와인이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너무 작으면 한입에 다 마시고 기다리게 되므로 분위기가 어색해지며 또 따라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요즘 우리나라에선 상당히 큰 와인 글라스가 유행하고 있다. 와인 글라스를 흔들면서 향을 음미하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와인 글라스는 이와 같이 와인을 따라서 마실 때 시각과 후각을 함께 만족시켜야 한다. 특히 샴페인을 마실 때는 시각을 만족시키는 글라스여야 하는데, 바닥에 있는 작은 돌출부에서 와인의 거품이 위로 올라오는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것도 긴 튤립 모양이나 플루트 모양이 일반적이다. 어떤 것이든 품위가 있어야 한다. 대접같이 생긴 샴페인 글라스(트로이의 헬레네 유방 모형이라고 알려진 것)는 쉽게 넘칠 우려가 있고, 오래 지속돼야 하는 샴페인의 부케(향)와 거품이 빨리 퍼져버린다.
또 보르도, 부르고뉴, 독일, 소테른 등 와인 종류에 따라 각각 글라스를 다르게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구태여 그런 속설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 외국의 비싼 글라스 메이커에서는 와인 글라스의 형태에 따라 와인이 혀에 닿는 부위가 달라지기 때문에 글라스 선택에 주의해야 한다고 하지만 사람의 얼굴과 입 모양이 제각기 다르니 이치에 맞는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맛과 향은 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 고급 와인을 고급 글라스에 따라서 마시면 더욱 맛이 좋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와인은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서 맛과 향이 변한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김준철 한국와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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