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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바꿔봐요] 공학의 정치도구화

시계아이콘읽는 시간2분 11초

'40년 외길 건설엔지니어'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의 주문


[이젠 바꿔봐요] 공학의 정치도구화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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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감사 이야기가 또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감사원은 같은 사안을 4번째 다루어야 할 입장이 됐습니다. 감사원으로서는 이전에 4대강 감사를 담당하지 않았던 이들에게 감사 업무를 맡기면 된다고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국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를 수 있습니다. '영혼 없는 도구' 같은 부처로 보일 것 같습니다. 토목공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말씀드리면 이 사안은 엄연히 공학적 의사결정이 전제가 되는 사안입니다. 사업의 타당성에서부터 최종 운영단계까지 결정해야 할 공학적 판단은 수백, 수천가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공학적 판단 중에는 ▲어느 강부터 정비할 것인가 ▲본류와 지류 중 어느 것부터 정비할 것인가 ▲예산, 인력, 자재, 장비 등의 자원 동원 측면에서 적정 공기는 몇 년인가 등이 있을 것입니다.


국가적 사업의 추진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의 정치행위에 속하는 일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공학적 판단은 이 사업에 참여하는 엔지니어들에게 맡기고 그들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것이 제대로 된 국정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정부에서도 그런 측면을 존중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국가적 논란은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엔지니어 내부에서도 떳떳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4대강 사업을 추진하던 당시, 사업의 방법과 절차가 부당하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는 엔지니어는 아직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시키는대로 했다는 분들은 많이 만났습니다.


기술(Technology)은 '자연현상을 이용하여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방법과 절차'를 말하는데 반하여, 공학(Engineering)은 '기술을 실현하는데 따르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요소들을 어떻게 조합하는가를 결정하는 행위'라고 나름대로 정의합니다. 특히 결정(Decision-making)하는 행위에 대한 책임과 권한이 공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4대강 사업이 끝나고 정부가 바뀌자 수많은 민간 엔지니어들이 시장 질서를 어지럽힌 죄로 법의 심판대에서 고초를 겪었습니다. 한국의 조달행정은 일찍 정보화가 이루어져서, 모든 입찰결과는 개찰 즉시 공개됩니다. 그런데 왜 정부가 바뀌고 나서야 담합 징후가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4대강 사업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빴던 후속 정부가 4년여 동안 준설이나 구조물 보수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닦고, 조이고, 기름치지' 않으면 금방 못쓰게 되는 것이 이치입니다. 4대강 사업 후 그대로 방치했으니 반대론자들이 그렇게도 염원하는(?)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1990년대 중반 성수대교에 이어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어 수백명이 사망했습니다. 여론이 들끓자 국회에서는 300명 이상 사망자를 낸 사고와 관련된 기술자를 사형시키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이 법을 발의한 분은 나이 30세에 서울시경국장을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던 분이었는데, 공직 시절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영어의 몸이 되었으나 교도소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 형 집행정지로 출감하였습니다. 남을 벌주는 자리에서 벌받는 자리까지 체험을 했던 분이 국회의원이 되자 또 그렇게 서슬퍼런 태도로 바뀐 겁니다. 이 법은 국가적 흥분이 가라앉은 후 결국 형량이 크게 조정되었습니다.


성수대교 사고 이후 지난 20년 동안 4번의 정권교체가 있었지만 전문가의 권한과 책임을 존중하는 정치적 진전은 없었습니다. 그런 사회적 합의가 정착되었더라면 세월호 사건 같은 불행한 일도 피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제법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댐의 설치 위치를 놓고 주민들의 반대가 심하자 당초 위치보다 상류쪽으로 옮겨서 건설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포켓(댐에 가두는 물의 양)이 작아져서 경제성이 떨어지게 됩니다. 준공 후 이 문제가 대두되자 주민들에게 물어본 즉, "전문가라면 우리가 아무리 반대를 해도 끝까지 소신껏 계획대로 했어야지"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주민들의 말이 틀렸다고 할 수도 없으니 씁쓸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죠. 그런데 이 결과에 대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는 차치하고, 이미 댐의 위치는 바꿀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비단 공직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책임만 있고 권한은 없다'라고 하소연 내지 불평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40여년 직장생활을 한 저는 '책임은 없고 권한만 있는 자리'는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책임을 질 터이니 권한을 주십시오"라고 요구하는 부하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책임지고 그만 두면 될 꺼 아닙니까"라고 사표를 던지는 사람보다는, 잘못된 일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진정성 있는 사람이 더 훌륭해 보이고 격려하고 싶었습니다.


요즈음은 탈원전 문제로 온 나라가 뜨겁습니다. 이 결정을 하는데 (기존 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원자력 전문가들은 참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갑자기 발표가 되는 바람에 여론이 끓고 있습니다. 정부는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 의견을 종합해 판단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원자력전문가는 참여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렇게 된다면 에너지 수요에 대한 중장기적 대처와 책임은 누가 지게 되는 것일까요. 나중에 정부가 바뀌면 그 위원회에 참석했던 비전문가들에게 에너지 수급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하나요.


새 정부는 켜켜이 쌓인 비리 등을 청산하고 국민의 뜻을 받들겠다는 약속을 하고 출범했습니다. 국민들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에게 자신들을 대신하여 나라를 잘 이끌어달라고 의사결정권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 줄 것을 염원합니다. 국민의 대표자가 국민의 뜻을 받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라는 측면에서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를 잘 이끌어 달라고 넘겨준 의사결정의 권리와 책임을 누가 얼마나 어떻게 지고 있을지 말이죠.


책임과 권한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부여되고 집행되는 나라, 전문가들이 자기의 지식과 양심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나라를 만드는데 정치권부터 앞장서 주시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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