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한때 서울 시청앞 서울광장은 시민들에게 단지 '선망의 대상'이었다. 1980년대 군부 독재 타도를 외치던 대학생들에겐 서울광장의 끝자락이라도 밟아 보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은빛 헬맷을 쓰고 청바지ㆍ청잠바를 입은 채 빽빽하게 들어찬 '백골단'의 장벽은 늘 그 시도를 좌절시켰다. 그때 치열하게 벌어졌던 시위대와 백골단의 싸움에 잠시 끼어들었다가 한 대 얻어 맞고 나가 떨어지면서 기자는 "이 광장이 뭐길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 시위대는 광장을 차지하려 하고, 경찰은 무지막지한 물리력을 동원해 밀어내려 하는가.
그 의문은 세월이 갈수록 차츰 풀려나갔다. 민주주의를 되찾은 후 서울광장은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난 뒤 차로와 분수대를 없애고 잔디광장을 조성해 누구나 집회나 행사를 개최할 수 있게끔 됐다. 이어 청계광장이 2005년, 광화문광장이 2009년 각각 완공되면서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결국 이 광장들은 2016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벌어진 '촛불시민혁명'의 공간적 배경이 되면서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광장을 차지한 시민들은 장기간 악전 고투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힘을 모아 잘못된 권력을 축출할 수 있었다.
이처럼 그저 겉보기에는 사람들이 모이는 물리적 공간일 뿐인 '광장'은 동ㆍ서양을 막론하고 그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시대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의미를 지닌다. 고대만 해도 광장의 주인은 시민이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의 아고라(agora)나 고대 로마의 포룸(forum), 삼국시대 길쌈놀이와 제천행사가 열리던 '마당' 등이 그 사례다.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서로 소통을 하며 종교ㆍ정치ㆍ사법ㆍ상업ㆍ사교 등의 사회생활을 꾸려나갔다.
그래서 때론 광장은 혁명의 근원지가 됐다. 프랑스 바스티유 광장, 중국 천안문 광장 등이 그랬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광장ㆍ광화문광장 등에서 3.1독립만세운동, 4.19 혁명, 한일회담 반대 투쟁, 6월 항쟁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반면 왕과 귀족 등 소수의 권력이 강할 수록 광장은 군대 사열 장소나 시장으로 쓰이는 등 제 역할을 잃었다. 군사독재 시절 우리나라의 여의도광장, 시청 앞 광장(서울광장) 등도 대표적 사례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광화문광장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 지속 여부, 청와대 앞 민주노총 농성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 광장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달라며 농성자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깨끗하게 정리돼 시민들이 산책하고 관광객 사진 촬영용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얘기다. '시민의 품'이라는 말은 그럴듯 하지만, 독재로 돌아가자는 얘기로 들린다. 광장은 그런 용도로만 쓰는 곳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살아 있는 전쟁터다.
그때 그때 시민적 합의와 최소한의 규제에 따라 큰 불법만 없다면 누구나 자신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맞다. 설사 그 곳이 청와대 앞길 한쪽 모서리일지라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원순 시장 취임 후 활성화된 서울시 열린광장시민운영위원회의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관, 정치의 개입없이 시민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광장 운영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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