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60주년 맞은 국민배우…주요 출연작 27편 골라 재상영
28일까지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전'
130여편서 사회적 과도기 아픔 전달
"연기력 절반이면 나머진 좋은 작품"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국민배우.' 눈부신 연기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수식어다. 한국영화의 성장과 함께 한 긴 역사와 영화인으로서의 모범적 행보, 스캔들 한 번 없는 단정한 사생활. 안성기(65)는 이 모든 것을 충족하는 몇 안 되는 배우다. 작품 130여 편에서 다채로운 연기로 시대의 흐름을 전했다. 그 얼굴은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늘어가는 주름에서 세월의 흐름을 읽고, 달라지는 배역에서 삶을 복기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은 그의 데뷔 60주년을 맞아 28일까지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전'을 한다. '모정(1958년)', '바람 불어 좋은날(19080년)', '고래사냥(1984년)', '기쁜 우리 젊은 날(1987년)', '개그맨(1988년)', '하얀전쟁(1992년)', '남자는 괴로워(1994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년)', '라디오스타(2006년)' 등 주요 출연작 스물일곱 편을 상영한다. 모두 영화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작품들이다. 안성기의 배우인생에도 다르지 않다. 그는 "배우의 인생에서 연기력이 절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좋은 작품을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안성기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은 정지영 감독(71)의 하얀전쟁이 아닐까. 그와 함께 작품을 선별한 이지윤 프로그래머는 "개막작으로 직접 고르셨다.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으셨지만,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베트남어를 전공하셔서인지 남다른 애정이 있는 듯했다"고 했다. 이 작품은 안성기의 요청으로 탄생했다. 안정효의 소설 '하얀전쟁'을 읽고 감명을 받아 '남부군(1990년)'에서 호흡을 맞춘 정 감독에게 영화화를 제안했다. 그는 "베트남전을 뒤집어본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했다.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소설가 한기주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다루는 영화다. 안성기는 시종일관 덤덤한 표정으로 한기주의 무료한 일상을 그린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면서 점점 미소를 잃는데, 초점을 잃은 시선과 무표정이 빛을 발휘한다. 시대의 무게에 억눌리고 집단화된 폭력에 감정이 말라버린 무기력한 지식인의 고통으로 나타난다.
안성기는 종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1980년대의 암울함을 자주 그렸다. 선 굵은 연기보다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사회적 과도기의 아픔을 전해 관객의 뇌리에 지울 수 없는 잔상을 새겼다. 이런 얼굴은 장선우(65), 박광수(62), 이명세(60) 등 소위 1988년 세대 감독들의 작품에서 도드라진다. 개그맨에서 정작 자신은 웃을 수 없는 삼류 카바레 개그맨 이종세, '칠수와 만수(1988년)'에서 암울한 인생을 붓으로 덧칠하는 간판장이 만수, '성공시대(1988년)'에서 자기 꾀에 속아 넘어가는 김판촉. 모두 사회의 무거운 공기에 억눌린 사내거나 속물 지식인이다. 그런데 안성기는 이 작품들보다 이장호 감독(72)의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년)'을 먼저 꼽았다. "사회적으로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는 시대였고, 정확하게 그 시대를 관통하는 작품이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안성기의 연기인생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다. 그는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1957년)'를 시작으로 아역으로만 서른네 편에 출연했다. 열일곱 살이던 1968년에 이성구 감독의 '젊은 느티나무'를 끝으로 영화 현장을 떠났다. 그리고 12년 동안 충무로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전혀 연기가 뭔지 몰랐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 신문광고에 나왔던 '천재 소년 안성기'라는 문구는 선전용이었지, 실제로는 거리가 있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역할마저 없어 흥미를 잃었다." 안성기는 강원도 금화에서 장교 복무를 마치고 1977년 김기 감독의 '병사와 아가씨들'로 스크린에 복귀했다. 안성기가 돌아온 영화 현장은 침체돼 있었다. 시국이 불안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독재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반정부 시위가 잇따랐다. 박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새 국면을 맞는 듯했으나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쿠테타를 일으켰다.
안성기는 이 무렵 바람 불어 좋은 날을 촬영했다. 도시 변두리의 중국집 배달부 덕배를 연기했다. 더벅머리와 사시, 파란 트레이닝복, 구수한 사투리로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사내의 모습을 무기력하게 표현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던 앳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격변하는 시대를 거치며 위태로워진 젊은 청년의 고뇌로 가득했다. 이 배역은 당시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남성상이기도 했다. 아버지, 사나이 등 마초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안성기는 2013년 6월 평론가 정성일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80년대라는 시대적인 것이 직선적이지 않고 표현이 우회적이어야 되고 풍자적이라는 것, 주인공이 똑똑해서는 위험하다는 것, 그런 캐릭터를 그 이후부터 쭉 가져간 거죠. 심지어 사랑 이야기인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도 더듬더듬 거리면서 말하는 톤이 된 것이고. 시대가 요구하는 캐릭터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비판과 변화를 외치는 작품에 두루 출연했지만, 좀처럼 튀는 법이 없다. 임권택 감독(81)의 '만다라(1981년)'에서 연기한 구도의 길을 걷는 젊은 승려 법운이 대표적이다. 한국의 사계절 속에 그대로 들어가 공허한 뒷모습으로 법운의 진심을 전한다. 임 감독의 '태백산맥(1994년)'에서는 김범우를 맡아 염상진(김명곤)과 염상구(김갑수)의 차가운 대립을 관객이 중심을 잃지 않고 지켜보게 하는데 충실하다. 톡톡 튀는 연기에 서투른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부패한 경찰을 다룬 강우석 감독(57)의 '투캅스(1993년)' 속 익살스런 연기만 봐도 알 수 있다. 감독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작품의 의도를 깊이 파악하고 이를 극대화하는데 전념한다고 봐야 한다. 그가 TV 드라마에 한 번밖에 출연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사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50분 분량의 촬영을 이틀 만에 끝냈다. 그 다음부터는 드라마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많은 생각을 하고 사람들과 얘기할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다. 또 관객들이 표를 예매하고 극장에 찾아가서 앉기까지 귀찮은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해, 캄캄한 자리에 앉아서 자기를 감동시켜 달라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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