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이 잠들어버리는 순간에만 나는 평온함을 맛본다. 그것이 깨어나는 순간 다시 불안이 엄습한다. 삶이란 야심의 상태이다. 굴을 파는 두더지도 야심에 가득 차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직 나 자신을 견딘다던, 허무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말했다. 무엇을 이루어보겠다는 마음은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인간을 집요하게 추동한다. 추동되는 상태를 선호하고, 그 상태가 인간을 나아가게 한다고 보는 사람도 많지만, 시오랑은 아니었던 듯하다.
무엇으로부터도 추동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그 반대보다는 훨씬 자주 하는 사람으로서, 야심가들이 동네방네 제 야심이 진정(眞正)하다고 소리치는 계절에는 혐오감이 깊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특정한 야심을 맹렬히 지지한다. 저 야심이 진짜 야심이지. 그런데 반대쪽에서는 또, 저 야심을 믿었다가는 다 망한단다. 저 야심 말고, '저' 야심이어야 한단다. 사납게 대치하는 그들의 야심 또한 야심가의 그것 못지않다. 아무래도 평소보다는 추동되기를 선택하는 쪽이 훨씬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좀 귀를 대고 들어보려고 하는데, 귀청만 떨어지고 뭘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나'의 야심이 세계를 (좋은 뜻에서) 엄청나게 바꿀 수 있다고는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 조금은 바꿀지도 모르지만 그 '조금'은 어차피 세계가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 만한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는 정도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세상을 당장 바꾸겠다고 호언하는 야심가는 물론이거니와 그 야심에 열광하는 풍경도 뜨악할 수밖에 없다. 타인의 야심, 심지어 내 야심의 방향을 의심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가?
말은 이렇게(!) 해도, 투표권이 주어진 이래 한 번도 그것을 포기한 적은 없다. 대단한 시민적 양심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의 야심이 세계를 확 좋아지게 하기는 어려워도 확 나빠지게 하기는 쉬워 보였기 때문이다. 내 손을 떠났던 투표용지들은 적어도, 한 공동체의 리더가 마땅히 가져야 할 두려움에 일인분의 무게를 얹기 위해서지, 리더의 야심에 장단 맞추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를 나아가게 하는 건 야심 자체보다는, 야심과 야심 사이를 지나가는 어떤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이를테면 낯선 장소에서 내게 길을 가르쳐주는 이를 진심으로 드높이는 마음, 군중 사이에서 불룩한 배낭을 가슴 앞으로 돌려 메는 마음, 이면지를 모으는 마음, 날카로운 물건은 손잡이 쪽으로 건네는 마음, 대접받지 않으려는 마음, 그러나 대접하려는 마음, 그런 마음가짐들의 합(合)에 가까운 것.
작년 이맘때 투표소에서 돌아오는 길에, 태어나 처음 보는 연보랏빛 꽃나무를 발견했었다. 도무지 어떤 색을 섞어야 저런 빛깔이 나올지 추측할 수도 없이 신비롭도록 황홀한 꽃나무였다. 5년 넘게 살아온 동네인데, 지나다니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니. 비록 또 당선되지 않은 후보와 또 원내에 진출하지 못한 정당을 찍긴 했으나 투표하러 나오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테니 나름대로 투표의 성과라 여겼다. 또다시 아름다운 계절에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번에도, 모종의 성과가 있지 않을까. 있길 바란다. 야심을 품고 말았다. 다시 시오랑을 떠올려본다. '아무런 야심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커다란 힘이며, 커다란 행운이다. 나는 그러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런 노력 또한 야심이리라.'
이윤주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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