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윤의 '시네한수' - 화려한 망상과 냉엄한 현실 사이…환상을 이어가는 두 여자
[아시아경제 디지털뉴스본부 김희윤 기자] 무성영화 시대를 주름잡던 여배우는 ‘목소리’와 함께 영화계에서 퇴출된다. 얼굴 연기만 할 줄 알았지, 자신의 ‘목소리’를 거기에 입히는 일은 해본 적도 없었고, 할 줄도 몰랐으며, 해도 잘 안 됐기 때문. 그럼에도 여전히 화려한 배우 시절의 생활에 젖어 살며, 늘 ‘복귀’할 수 있다는 바람과 망상으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보낸다. 영화 <선셋대로>의 스타, ‘노마 데스먼드’의 이야기다.
과거를 현재처럼 사는 여인
영화는 파산 직전의 시나리오 작가 조 길리스의 죽음에서 출발한다. 화려한 대저택 수영장에 떠오른 남성의 시신, 죽었던 그를 보여주던 영화는 돌연 그가 살아서 이 저택에 걸어 들어온 6개월 전을 비추며 관객 앞에 무성영화 시대의 전설, 노마 데스먼드를 소개한다.
“당신은 노마 데스먼드 군요. 무성영화에 나왔었죠. 대단한 배우였어요.”
“난 아직도 대단한 배우야. 보잘 것 없어진 건 영화지”
노마는 무성영화에 최적화된 배우였지만, 목소리를 담는 유성영화가 등장하면서 곧장 할리우드에서 퇴출당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얼굴과 아우라가 갖는 상징성과는 너무도 상반되는 데다, 감정표현 또한 형편없었기 때문. 하지만 그녀는 시대와 현장이 바뀌었음을 부정하고, 자신은 여전히 대배우이며, 유성영화를 통해 도래한 새로운 시대는 하찮을 뿐. 대저택에서 홀로 화려한 배우생활을 이어나간다.
망상보다 무서운 집착적 조력
우연히 침입한 조 길리스에게 자신의 복귀 영화 시나리오를 맡기는 노마는 작업을 핑계로 젊고 매력적인 그를 탐닉하고, 무일푼의 조는 그녀의 재력과 무시무시한 아우라에 사로잡혀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인다. 그런 노마와 조 곁을 항상 지키는 건 노마를 스타로 만들었던 감독이자 전 남편, 그리고 이제는 집사를 자처하며 그녀와 저택을 돌보는 막스 폰 마이얼링의 존재다.
스스로 과거에 젖어 사는 노마의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가짜 팬레터를 쓰고, 자신이 연출했던 흑백 무성영화를 직접 영사기를 돌려가며 상영하는 그의 손길이 있어 노마는 과거의 영광, 빛났던 순간에 여태 머무를 수 있었던 것. 그녀는 이 잘 짜인 세트장과 소품 속에서 자신은 언제든지 스타의 자리로 복귀할 수 있다 믿으며, 그녀의 차를 소품으로 쓰고자 걸려온 파라마운트의 섭외 전화조차 캐스팅 전화로 오인할 만큼 망상장애를 보이지만 그렇게 찾아간 세트장의 감독 세실. B. 드밀 부터 곁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조와 막스 모두 입을 다물고 그런 그녀의 몸부림을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도 그녀에게 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고독한 살로메, 그리고 카메라 앞의 최후
노마는 자신의 할리우드 복귀작 ‘살로메’ 집필을 조에게 맡긴 상태. 요한의 목을 갖기 위해 자신의 삼촌이자 의붓아버지가 된 헤롯왕 앞에서 일곱 베일의 춤을 추는 살로메의 소름 끼치는 춤사위는 현실에서 조, 그리고 가상의 팬과 상상 속 영화까지 모두 가지고, 또 이뤄야 하는 그녀의 욕망과 정교하게 겹쳐지고, 끝내 자신을 거부하고 젊은 여인 베티에게 가겠다는 조 앞에서 자살소동을 벌이던 노마는 끝내 가질 수 없는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조의 살인혐의로 자신을 연행하러 온 경찰 앞에서도 꿈쩍 안 하던 그녀는 자신을 취재하기 위해 ‘카메라’가 왔다는 소리에 두 눈을 반짝이며 도도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혼신의 연기를 펼치는데, 그 결연한 자태하며 이 자리에 없는 드밀 감독을 호명하는 태도는 한 시대를 사로잡은 대배우만이 가질 수 있는 연륜이자 강력한 힘이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우리와 카메라들과, 저기 어둠 속에서 경이로운 사람들...”
영화 <선셋대로>가 정교하게 그려낸 망상장애 속 한 여인의 삶, 대 저택에서 외부와 격리된 채 과거의 화려한 시절을 떠올리며 고독한 시간을 보내는 그 모습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녀’의 삶과 너무도 비슷해 현실의 기시감처럼 느껴질 정도다. 오늘 그녀를 기다리는 수많은 카메라와 취재진 앞에서 과연 그녀는 어떤 말을 꺼낼까?
영화 속 스타 노마 데스먼드는 먼저 카메라를 응시하며 차분하게, 그리고 절도있게 한 마디를 남겼다.
“좋아요, 드밀 감독님. 난 클로즈업 준비가 됐어요.”
디지털뉴스본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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