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흥순 기자]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뒤 우리 체육은 구조적인 허점과 한계라는 민낯을 확인했다. 정부 주도로 기업을 옥죄어 기금을 운용하고, 스포츠 팀을 창단하거나 특정 종목을 지원하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등 부조리가 발생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쉰세 개 회원사를 대상으로 총 774억 원을 모금한 미르·K스포츠재단이나, 장애인 펜싱 팀의 창단 강요, 한국동계스포츠영재재단 설립과 운영 등이 주요 사례다. 헌법재판소가 10일 결정한 박 대통령 파면에도 이러한 혐의가 영향을 주었다. 최순실 일가가 이권에 개입한 정황도 드러났다.
스포츠는 이 과정에서 정경유착이라는 굴레를 유지하는 또 다른 도구로 작용했다. '정부의 말을 듣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나 '기업은 이에 상응하는 혜택을 따낼 수 있다'는 판단 아래 거래(?)가 성사된 셈이다. 정유라씨 승마 훈련을 지원하고, 장시호씨가 동계종목 영재재단을 운영하면서 특정 기업이 이를 뒷받침한 혐의도 무관하지 않다. 이 과정에서 체육정책을 주도하는 문화체육관광부도 개입한 정황이 있다. 부조리에 걸림돌이 될 만한 공무원들을 강제로 몰아내거나 예산 삭감, 감사 등으로 경기단체와 스포츠계 인사들을 회유하고 압박했다.
병폐는 우리 체육이 국가 주도로 성장한데서 비롯됐다. 이는 박정희 시대가 부추긴 '체육보국(體育報國)'의 정신에 기초한다.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고, 국격을 높이는 일이 애국이자 체육인의 명예였다. 수단이나 과정은 함몰됐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주요 대회에서 대표 선수들의 성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분위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다시 불거진 체육특기자 논란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수한 학생 선수들을 상급학교에 진학시켜 동기를 부여하고, 좋은 성적을 거두는 인재로 활용하기 위해 1972년 도입한 이 제도는 비리 문제가 끊이지 않아 폐지하자는 주장이 반복되고 있다.
5공화국 주도로 창설한 프로스포츠도 정부와 기업의 합작품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대다수 프로구단이 모기업의 지원에 크게 의존하면서 자생보다 팀 성적에 초점을 맞춘다. 기업은 사회공헌과 구색이라는 명분으로 손해를 감수하면서 프로팀을 운영하고, 구단은 기업의 예산이 줄까봐 전전긍긍하는 형국이다.
박근혜 정부는 취임 초 '국민이 건강하고 체육인이 힘이 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슬로건과 함께 체육계 변화를 약속했다. 2013년 8월 22일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주도 아래 '스포츠비전 2018' 계획안을 발표하고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다. ▲2018년까지 생활체육 참여율 43%→60%로 증가 ▲스포츠산업 규모 37조 원→57조 원으로 확대 ▲체육관련 일자리가 24만200개→28만6000개로 증가 ▲세계 상위 경기력 유지와 국제 스포츠계 입지 강화 등이다. 체육 관련 예산도 2013년 5.1조원에서 지난해 6.6조원으로 늘었다. 스포츠토토 발행량을 확대하면서 재원을 마련했다. 그러나 체육계 성장과 발전이라는 목표가 변질되고, 사행성을 조장하면서 불법 스포츠도박과 승부조작 같은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탄핵 인용은 체육계에 40년 넘게 누적된 병폐를 청산하고, '국민 건강과 행복증진'이라는 선진 스포츠 시스템으로 이행할 기회다. 체육계 한 인사는 "정부 주도에서 벗어나 체육계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전문 지식과 경험을 갖춘 인물을 등용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정정당당한 가치를 근본으로 하는 스포츠 정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김흥순 기자 spor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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