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두리 없는 햇빛의 책방이었다
내 면상을 꿰뚫듯이 올려다보는 얼음장들, 새가 날지 않는 물밑이니, 물고기가 돌아다녔다 어떤 맹목이 저리 맑은 것인지, 한번은 얼음 강을 건너가고 싶었다
고요를 파고드는 회오리처럼
새가 날았다 가녀린 발목에 얼음 붕대를 감고, 늦추위를 껴입고, 짝짝이 양말을 펄럭거리듯 다리목을 건너갔다
유리컵의 버들강아지가
겨우겨우 눈을 틔우기 시작했다
강줄기 한복판의 얼음장이 가장 시퍼랬다 거기서 누가 수심을 잰 듯, 나무 막대기가 수직으로 꽂혀 있었고, 그걸 꽂아 둔 이는 보이지 않았다
모서리 없는 햇빛의 책방이었다
■ 한겨울 동안 꽝꽝 얼어 있던 강의 얼음들도 이제 곧 스르륵 풀릴 때가 되었다. 아마도 여느 시인들이라면 이맘때를 두고는 저 강둑에 소담스럽게 피어오르기 시작한 봄기운부터 살피느라 분주했을 것이다. 이 시 또한 얼핏 보면 그러한 듯한데, 찬찬히 짚어 보면 시인의 눈길은 아직 건너 보지 못한 "강줄기 한복판"에 꽂힌 "나무 막대기"에 맺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어쩌면 이를 두고 그저 '미망'이나 "맹목"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시인이라면 아니 사람이라면 일생을 두고 "한번은" 이루어야 할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이 비록 자신을 위태롭게 할지라도 말이다. "한번은 얼음 강을 건너가고 싶었다"라는 문장은 그러니까 다만 이루지 못한 삶에 대한 뒤늦은 후회를 적바림해 둔 것이 아니라 "늦추위를 껴입"고라도 기필코 생의 "한복판"을 여전히 돌파하고자 하는 날선 결의이며, 저 "테두리 없"고 "모서리 없는 햇빛의 책방"은 그로부터 연원한 "저리 맑은" 어떤 정신의 경지인 셈이다. 근래 만나기 힘든 명징(明澄)하고 굳센 시다.
채상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