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오상도 기자] "어떤 정치적 욕심도 없습니다. 이 당에서 제 소임을 다하면 언제든지 훌훌 털고 되돌아갈 겁니다. 민주공화국의 정체성과 보수의 진정한 가치를 흔들림 없이 지켜나가겠다고 약속합니다."
난파 위기에 처한 새누리당이 29일 국회에서 열린 전국위원회에서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을 만장일치로 추인했다. 전국위는 최근 분당 사태로 정족수 미달의 우려가 나왔지만 정우택 원내대표가 주도하는 중도성향 지도부의 독려로 무난히 고비를 넘겼다. 전국위 소속 위원 중 70% 가량은 친박(친박근혜) 성향으로 분류된다.
인 비대위원장은 취임사에서 "국민의 질타와 분노, 최악의 정당 지지율, 보수정당 붕괴와 원내 2당 전락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한 현실이 새누리당의 현재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같은 시각, 국회 앞에선 인 비대위원장 추인에 반대하는 보수단체들이 목소리를 높여 시위를 벌였다. 과거 진보성향의 시민사회단체운동 경력을 문제삼은 것이다.
새누리당은 인 비대위원장 추인과 함께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당 쇄신을 위한 인적 청산이 핵심이지만 갈 길이 험난하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친박 핵심 인사들을 어느 정도 물갈이할 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으나 기대에 부응하는 수준의 쇄신은 어려울 전망이다.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의 한 인사는 "인 비대위원장이 추인 직전 인적 쇄신이 우선이라고 했다. 당 로고나 이름을 바꾸는 건 얕은 수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고 전했다.
인 비대위원장은 지난 2006년 ‘강재섭 대표 체제' 당시 한나라당 개혁 차원에서 중앙윤리위원장으로 영입된 인사였다. 그는 윤리위원장 취임 뒤 성추문, 논란이 된 발언 등 문제행위를 한 인사들을 가차없이 윤리위에 회부해 징계했다. ‘한나라당의 저승사자’란 별명이 붙었다. 당시 “6·15민족통일대축전 때 광주는 해방구였다”라고 말했던 김용갑 전 의원이 징계를 받은 게 대표적인 사례다.
인 비대위원장은 실제로 1970년대 도시산업선교회를 이끌며 재야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유신시절 옥고를 치른 재야 운동가 출신이다.
하지만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지낸 뒤 진보진영은 물론 보수진영으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인 비대위원장의 한 측근은 "함께 시민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10년 가까이 접촉을 꺼렸고, 당시 한나라당 인사들도 밥 한 번 먹자며 연락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당내 친박계 인사들과 다소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인 비대위원장은 당 윤리위원장 당시는 물론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에도 박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밝혀 친박 진영에서는 ‘반박(반박근혜) 인사’로 불렸다.
이런 인 비대위원장이 칼자루를 쥐면서 새누리당은 당분간 혼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벌써부터 일부 친박 인사들은 "사상 검증을 해야 한다"며 색깔론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아울러 인적 쇄신 1순위인 친박계 좌장 서청원 의원이 인 비대위원장 영입에 일정한 역할을 한 것도 논란거리다. 서 의원의 상징적 2선 후퇴가 당 쇄신의 전제가 돼야 하는데, 과연 제대로 쇄신의 칼을 휘두를 수 있느냐며 의구심이 일고 있다.
이런 인 비대위원장은 이날 추인을 받기까지 곡절을 겪었다. 새누리당이 영입 발표까지 했으나 인 비대위원장이 이를 고사해 어려움을 겪었다는 후문이다.
인 비대위원장은 당장 비대위원 선임이란 난관에 봉착해 있다. 첫 시험대 격으로, "새누리당에 오겠다"는 외부 인사가 거의 없어 이날 함께 비대위원 추인이 이뤄지지 못했다. 당헌·당규에는 15명 이내의 인사를 선임하도록 했는데, 어느 정도 규모로 꾸려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당내 인사의 경우 초·재선 의원을 중심으로 인 비대원장이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인 비대위원장 측은 늦어도 1월 초까지는 관련 외부 인사들을 접촉해 인선을 마무리하겠다는 방침이다.
인 비대위원장 체제의 딜레마는 또 있다. 3개월 안팎으로 점쳐지는 비대위 체제가 과연 대선 정국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선 후보를 낼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한 새누리당은 이미 '불임 정당'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조기 대선 직전 활발한 보수진영의 이합집산이 벌어지고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 귀국이 파장을 일으키면 새누리당에선 다시 대규모 '탈당 러시'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자칫 정식 지도부를 꾸리기도 전인 비대위 체제에서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보수정당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인 비대위원장이 개혁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 수 없는 이유다.
새누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지도부에서 전권을 주는 조건으로 모셔왔다"며 "비대위 구성이나 활동에 대해 최대한 수용하고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오상도 기자 sdo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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