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요즘 하루에도 몇 차례씩 라디오나 TV에서 나오는 공익광고의 한 대목이다.
광고의 줄거리는 이렇다. 멀끔한 장년의 남자가 은근한 말투로 "이번 것만 잘 부탁해"하면서 양복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그가 "그리고 이것, 괜찮아 이사람아." 하면서 탁자 위에 봉투 하나를 올려놓는다. 맞은편 남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자 이 지켜보던 사람들이 긴장한다. 과연 그는 봉투에 어떻게 반응할까.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받겠습니다." 사방에서 실망의 한숨이 터져 나올 때 반전이 일어난다. "받겠습니다. 마음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의 결기 있는 행동에 모두가 일어나 환호한다. 마지막 한마디가 울려 퍼진다. "청렴한 마음과 거절하는 용기, 우리 모두의 바람입니다." 국민권익위원회가 만든 청탁금지법 공익광고다.
나는 이 공익광고를 라디오에서 처음 들었을 때 참으로 의아했다. 마음만을 받겠다고?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데? 광고의 흐름을 보면 돈 봉투를 내놓은 자는 불법 또는 편법의 인허가나 납품, 아니면 인사 청탁을 성사시켜 한 건 하려는 모습이다. 후배 정도로 보이는 상대방은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공직자이거나, 거래처 담당자 일 것이다. 돈으로 매수를 시도한 자체가 여간 불순한 것이 아니다. 그의 마음만을 받는 다는 것은, 비록 돈은 안 받지만 그의 청탁을 잘 챙겨보겠다는 뜻이 아닐까. 그것은 부정과 비리와 무관한가. 그의 부정한 마음까지 마땅히 거절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마음만을 받겠다'는 자세가 아름다울 때는 따로 있다. 카네이션을 들고 온 제자를 되돌려 보내야 하는 선생님, 늦은 밤 주민이 들고 온 간식꺼리를 사양하는 파출소 경찰. 그런 사람들이 고마움을 진심에 담아 썼을 때 빛이 나는 표현이다.
결코 국민권익위원회가 지향하는 청렴한 사회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최순실 스캔들을 놓고 해외에서 '한국적 부패'라거나 '구조적 병폐'라고 진단하는 데는 우리가 쉽게 놓치고 있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 '마음만 받겠다'도 그런 한국적 사고의 편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선의(善意)를 거절하면 안 된다는 사회적 통념,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는 자기최면. 돈이 오가지 않으면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물렁한 생각. 부정과 불의, 불법은 이런 미세한 틈새를 파고드는 법이다.
최순실 스캔들에서 한국적 사고와 외국의 시각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대목의 하나는 권력(청와대)과 재벌의 관계다. 박근혜 대통령은 "1원도 사익을 위해 쓰지 않았다"며 죄 없음을 강조했고 재벌 총수들은 "대가성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공익사업에 선의로 지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외언론은 대통령이 기업인들에게 돈을 말하는 상황 자체를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5·16 직후 부정부패 혐의로 궁지에 몰린 기업인들이 구명 차원에서 만든 조직이다. 이후 재벌들은 전경련을 통해 민원을 전달하고 역대 정부는 그들의 돈을 뽑아내는 창구로 활용해 왔다.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의 사례가 낯설지 않은 이유다. 해외에서는 그런 행태를 놓고 전형적인 '후진국형 정경유착'이라 말한다.
재벌기업은 사(私)기업이다. 수많은 주주와 소비자, 종업원이 그 안에 있다. 명분이 그럴듯하면 사기업의 돈을 뜯어내도 좋은가. 부정한 돈은 거절하되 그 마음은 받아도 괜찮은가. 어려울 때 도와준 인연을 공직에 올라 보답하는 것이 의리인가. 아니다. 이제 생각을 바꿔야 한다. 결연하게 끊어야 한다. 더 이상 불행한 권력자, 그를 바라보는 불행한 국민이 나와서는 안 되니까.
박명훈 전 주필 pmhoon@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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