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화단의 큰 별들, 아내를 향한 애틋한 사랑의 문자들
[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광섭의 시 '저녁에'
열렬한 사랑은 수천 년 인류 역사상 예술가에게 있어 마르지 않는 창작의 샘으로 가슴 속에 고여 있고, 우리는 샘을 품고 나온 예술가의 작품에서 우물에서 물 긷듯 기쁨과 슬픔, 격려와 위로를 얻어왔다. 한국 화단의 거장으로 남은 작가들의 캔버스 뒤엔 내자를 향한 뜨거운 사랑과 결 고운 마음이 있었다. 이젠 만나볼 수도 없는 화가의 삶, 그 곁에 남은 사랑의 편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를 작가가 그녀에게 부쳤던 편지를 통해 엿보려 한다. 늘 그렇듯, 몰래 훔쳐보는 연애편지만큼 가슴 떨리는 문장이 또 있을는지 되뇌면서.
아내에게 이름을 준 사내, 김환기
지난달 29일 홍콩에서 진행된 서울옥션 경매에서 김환기 화백의 작품 ‘무제 3-V-71 #203’가 45억6,240만 원에 낙찰돼 국내 역대 미술품 경매가 3위를 기록했다. 이에 앞선 지난 4월 4일 홍콩 경매에선 김 화백의 ‘무제’가 48억6,750만 원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가를 경신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오늘날 빛을 발한 김환기 화백의 정력적인 작품활동의 뒤엔 평생 그의 곁을 지키며 반려자로, 때로는 조력자로 헌신한 아내 김향안이 있었다.
그녀의 본명은 변동림, 시인 이상의 마지막을 함께한 아내로 당대에도 유명한 여인이었으나 김 화백은 세간의 이목보다 그녀를 향한 마음에 집중했다. 본인도 조혼을 통해 세 자녀를 둔 이혼남이었기에, 두 사람은 서로가 가까워지는 것을 저어했으나 끝내 반대를 극복하고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녀는 변동림으로서의 자신을 버리고, 그의 아내로 살겠다는 의지를 담아 김환기의 아호인 향안을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 그리고 결혼 후 그녀는 김향안으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살았다.
“빨리 경성에 돌아가야 할 텐데. 하루 더 있기가 천추와도 같습니다. 아! 난 오랜 세월을 이 고장에서 어떻게 지냈던고. 앞으로 반생이 아득히 생각되지만 나를 믿어야지. 그림이 그리고 싶습니다. 화실이 갖고 싶습니다.” - 김환기, 아내에게 쓴 편지, 1944. 10
고향인 신안 안좌도에 잠시 내려가 있는 동안 아내에게 보낸 김 화백의 편지에선 창작을 향한 열망과 수줍은 그리움이 잘 묻어나 있다. 이후 파리, 뉴욕으로 이어지는 김 화백의 작품 활동 중간중간 김 여사와 주고받은 많은 편지가 있었으나, 김 여사는 후일 “두 사람 사이에 오간 편지 중 사사로운 이야기는 불살랐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김 화백은 아내를 향한 지극한 마음을 당시 잡지 칼럼을 통해 드러내기도 했다.
“아내는 내가 술을 마시든 게으름을 피우든 아무 소리가 없다. 돈을 못 버는데도 아무 소리가 없다. 먹을 것이 있든 없든 항상 명랑하고 깨끗하다. 아내가 능금을 좋아하는데 궤짝으로 사다 두고 먹여본 적이 없다. 과용하고 돌아오는 길, 몇 알 사 들고 와서 손에 쥐여주면 그만 어린애같이 좋아한다. 나는 아내가 능금을 움푹움푹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김환기, <산처기 山妻記>, 《신천지》 1952. 3
귀여운 나만의 아내를 그리던 남자, 이중섭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해방과 전쟁, 그리고 분단에 이르기까지 이중섭 화백의 길지 않은 생애는 격랑의 한국사 복판을 관통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일본 유학 시절 만난 연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결혼에 이르러 행복한 시간도 잠시, 광복과 전쟁에 휩쓸려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고향 원산에서 내려와 부산, 제주에서 피난 생활을 이어갔고, 가난과 건강문제로 가족을 일본으로 보낸 뒤 한국에 남아 홀로 작업에 매진했던 그는 아내와 아들들을 향한 그리움을 틈날 때마다 편지에 실어 보냈다. 거칠고 생동감 넘치는 필치의 화풍으로 기억되는 그이지만, 편지 속 ‘중섭, 대향, 구촌(이 화백의 이름, 호, 별칭)’이 속삭이는 문장은 보드랍고 따뜻하며 참으로 애련하다.
“나는 언제나 생각하오. 나의 귀여운 남덕 군은 화공 대향에게는 안성맞춤의, 참으로 훌륭하고 멋진 아내라고, 이토록 대향에게 들어맞는 귀엽고 참된 여인을 하늘이 잘도 베풀어 주었다고. 화공 대향은 실로 귀여운 남덕을 어떤 방법으로 사랑해야만 남덕의 아름다운 마음에 대향의 애정이 가득히 넘칠는지 지금도 열심히 생각하고 있다오. 나의 품안에 포옥 안기는 자그마하고 귀여운 단 한 사람인 나의 아내여, 안심하고 나를 믿고 기다려 주오.” - 이중섭, 아내에게 쓴 편지
그는 아내에게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란 뜻을 담아 이남덕 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직접 지어주었다. 함께 지내던 시절 그녀와 즐겨먹던 아스파라거스 통조림과 그녀의 발가락이 닮았다며, 편지의 말미엔 꼭 ‘발가락 군’의 안부도 살펴달라는 애교 섞인 주문도 잊지 않았다.
“건강하게 대향을 기다리며 계속 아이들의 일, 발가락 군이며, 포동포동한 손가락, 깜빡깜빡하는 당신의 다정한 애정을 말하는 눈, 보들보들한 입술, 얼만큼 살이 쪘는가, 하루에 몇 번이나 발가락을 씻고 있는지, 꼭 답장을 주기 바라오.
매번 발가락 군의 소식 써 보내 주시오. 그럼 나의 가장 멋지고 귀여운 사람이여, 당신의 모든 것을 오래오래 힘껏 껴안고 있을 테니 가만히 있어 주오. 길고 긴 입맞춤을 보냅니다.” - 이중섭, 아내에게 쓴 편지
‘사랑한다’는 말보다, ‘발가락’이라는 표현 속에 우주만큼 깊은 감정, 그리고 그리움이 스며 읽는 이의 마음에 녹아 흐른다. 짐짓 가벼워 보이나,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고작 30g 남짓의 종이 속에 사랑, 그리움, 그리고 뜨거운 생명이 담겨있었다. 이 간절한 그리움은 끝내 그의 삶을 옥죄고 앗아갔다. 짧은 일본에서의 해후 이후 끝내 가족을 다시 보지 못했던 이중섭은 1956년 만40세 나이에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다.
뙤약볕 아내를 위해 양산을 훔친 남자, 박수근
단조롭지만 독창적 화법으로 소박한 우리네 서민을 그려낸 박수근 화백의 작품에선 평면적인 질감, 어두운 색채를 통해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더불어 화가 자신의 어려운 삶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다고들 한다.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 중 ‘빨래터’는 김환기 ‘무제’가 경매에 나오기 전까지 국내 미술품 사상 최고액 (2007년, 45억 2,000만 원)을 기록했다. 강원도의 유복한 집안 아들로 태어났으나, 이내 가세가 기울고 어머니를 여의며 회화에 대한 재능을 스스로 닦아나간 그는 오랜만에 찾은 고향 빨래터에서 한 여인을 운명적으로 마주하고 나선 편지에 자신의 마음을 적어 내렸다.
“일전에 당신이 우리 어머니와 빨래하러 같이 가셨을 때 어머니 점심을 가져간다는 핑계로 빨래터에 가서 당신을 자세히 보고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귀여운 당신을 내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 박수근, 아내에게 쓴 첫 편지
아내는 부유한 집안의 딸로, 가난한 박수근 화백의 집안 형편을 잘 알던 그녀의 아버지는 이 결혼을 완강히 반대했으나, 진실한 마음을 나눈 두 남녀는 난관을 극복하고 사랑을 키워나갔다. 이에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춘천의 부유한 집안 자제와 정혼시키겠다 선언하고 딸을 호되게 다그쳤고, 이를 지켜본 박수근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참으로 미안합니다. 나로 인해 아버지의 매를 맞는 당신에게 내가 무슨 말로 사과를 드려야 할까요? 그러나 당신 못지않게 나의 마음도 몹시 아팠습니다. 소설에서나 영화에서 실연을 당하고 자살을 한다든가 병이 난다든가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못난 사람이라고 흉을 보았습니다. 그러던 내가 당하고보니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춘천으로 약혼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참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습니다. 나는 스스로 의지가 강하다고 자부했었는데 이처럼 약한 줄이야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 박수근, 아내에게 쓴 두 번째 편지
결국 어렵사리 결혼에 성공한 부부는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주고받으며 가정을 꾸려나갔다.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힌 일본의 수탈이 거세던 일제 말엽 어느 날, 뙤약볕 아래 어린 아들을 업고 밭일을 하는 아내 앞에 별안간 박 화백이 다가와 양산을 드리웠다. 입에 풀칠하는 것도 버거울 만큼 곤궁한 형편에 양산이 웬 건가 싶어 어디서 났느냐 묻는 아내의 질문에 박 화백은 머뭇거리다 “당신이 성소(아들)를 업고 뜨거운 햇볕 속에서 양산 없이 다니는 게 너무도 가슴 아팠으나 양산을 살 돈은 없고 해서... 어느 상점에서 훔쳐 온 것이라오.”라고 답했다. 아내는 남편을 설득해 다음 날 상점에 양산을 돌려주게 했지만, 그 마음만큼은 그녀 가슴에 오롯이 남았으리라. 아내 김복순 여사는 박 화백 사후 펴낸 책에서 이날 일을 두고 “내게 베푼 그 뜨거운 사랑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한없이 뜨거운 사랑”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캔버스 이면, 편지가 갖는 범속성
작품에 매겨진 가격만으로 작가의 창작세계를 넘겨짚고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에도 세간의 도마 위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세 작가를 대중들은 끊임없이, 그리고 틀림없이 사랑한다. 이미 신화화된 이들의 삶을 끝없이 되뇌고, 검증된 학술적?미학적 가치를 소비하는 사이 세 거장의 화폭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시장의 꼭대기에 머무느라 올려다봐야 함에도, 이를 기꺼워하길 마지않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세 남자, 그리고 그들이 사랑했던 세 여자, 남아있는 편지들 속에서 작가이기 이전에 남편이자 아버지요 평범했던 한 남자가 곁에 앉아 속삭이듯 읊조리는 것을 엿듣고 나니, 이제 이들의 작품을 다시 마주할 때 전과 같지 않은 감정이 가슴에 내려앉을 듯하다. 너무도 사사로운, 그럼에도 아름다운 마음을 알았으므로.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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