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겐 이미 '위인' 반열에 올라 있다. 과장되게 표현하면 단군 할아버지,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등과 동급이다. 어린이들은 '반기문'을 통해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배운다. 유엔 사무총장이 사실은 '세계 대통령'이 아니라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이해 관계 조절을 하는 '대리인' 정도에 불과하다는 현실론은 일단 그냥 넘어가자.
그런데 반 총장의 최근 행보는 아이들에게 보고 배우라고 권하고 싶지 않다. 오랜만에 고국에 돌아온 그는 사실상 적극적인 대선 예비 후보로서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아프리카 순방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방한해 '미래 권력'과 '현재 권력' 사이에 사전 협의가 돼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문제는 대권 행보 자체가 아니다. 반 총장이 대통령 자리에 도전하겠다는 것은 본인의 자유다. 우리나라 국민들 중 반 총장이 차기 대통령이 되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그의 대권 행보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임기가 채 끊나지도 않은 '세계 대통령'이 본연의 임무보다는 '다음 자리'를 위해 뛰고 있는 모습은 아이들에게 보여주기가 민망하다. 유엔 사무총장이 그렇게 한가한 자리였던가. 또 세계인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안 그래도 최근 영국의 한 언론은 반 총장에 대해 '역대 최악의 실패한 총장'이라는 혹평을 내놓은 적이 있다. 이 언론은 반 총장에 대해 "유엔 내 행정 능력이나 유엔 밖 통치 능력 모두에서 실패한 총장"이라며 "대국의 눈치로 코피 아난 전 총장들에 비해 강대국에 맞서기를 꺼린다"고 지적했다.
반 총장의 차기 대선 출마가 유엔 총회 결의에 어긋난다는 주장도 귀담아 들어봐야 한다. 유엔은 1946년 총회에서 '유엔 사무총장 지명에 관한 약정서'를 채택해 유엔 사무총장은 여러 나라의 기밀을 공유할 수 있다는 이유로 '회원국은 사무총장에게 어떠한 정부 직위도 제안해서는 안 되며 사무총장도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명시해 놓았다.
일각에서는 유엔 4대 사무총장 쿠르트 발트하임을 전례로 든다. 그러나 발트하임은 퇴임 후 5년이나 지난 뒤인 1986년 오스트리아 대통령이 됐다. '회전문 방지'라는 결의안 취지를 최대한 존중한 것으로 퇴임 당해에 대선에 출마하려는 반 총장과는 비교가 될 수 없다. 이런 상태에서 반 총장의 내년 대선 출마는 그나마 애써 쌓아 놓은 본인의 명성은 물론 한국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 가능성이 높다. 반 총장이 한국인의 자긍심을 키워주는 존재에서 '규칙을 지키지 않는', '근무 시간에 딴 짓 하는' 사람의 대명사로 전세계에 각인될 지도 모른다.
그래도 차기 대선에 출마하고 싶다면 최근 여론조사의 높은 지지도와는 별개로 반 총장 스스로 먼저 자신의 자격을 검증해 볼 것을 권한다. 과연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이끌 능력과 사명감과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통일시대를 이끌어 갈 비전과 갈라진 사회를 통합하고 소외된 이들을 보듬어 안고 상처를 치유해 줄 따뜻한 마음이 있는지. 대통령의 자리는 '기름장어' 언변술로만 통할 자리가 아니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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