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철응 기자]기업 구조조정을 할 때 대주주의 책임 문제는 항상 '뜨거운 감자'였다. 돈을 빌려준 채권단 입장에서는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을 해 온 대주주가 사재를 출연해야 책임 있는 자세이며 회생을 위한 채권단의 지원 명분이 생긴다고 본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현대상선을 살리기 위해 최근 300억원가량의 사재를 출연키로 했다. 부채 규모가 6조원대에 이르기 때문에 재무적 효과는 미미하지만 회사를 살리기 위한 오너의 진정성을 보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채권단은 자율협약을 통한 현대상선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자본잠식 상태에 빠진 삼성엔지니어링을 위해 지난해 말 3000억원의 사재를 털어 유상증자에 참여키로 했다. 앞서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도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가 워크아웃에 돌입하자 2010년 3300억원의 사재를 출연했다. 지난해 말 박 회장이 금호산업을 되찾고 그룹 재건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사재 출연이 밑바탕이 됐다는 평가가 많다.
반면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의 경우 2014년 채권단의 압박으로 경영권을 박탈당했는데 "의미있는 사재 출연이 없었다"는 게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대주주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사재 출연은 당연하다는 견해와 책임의 범위를 넘어선 과도한 요구라는 반박이 맞서면서 논란은 지속돼 왔다.
하지만 새로운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에 '책임있는 자들의 공평한 손실 분담' 강행규정이 신설되면서 사재 출연 자체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사재 출연을 못한다면 경영권 박탈이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원회는 대주주 및 그 친족, 경영진, 노동자 등을 손실 부담 대상으로 적시하고 있다. 채권단 입장에서는 법적 근거를 갖고 대주주를 압박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재계는 반발하고 있다. 기업을 회생시키고 구조조정을 촉진한다는 기촉법의 본래 취지가 무색해질 것이란 우려다.
재계는 "기촉법의 전제는 기업의 회생이고 경영권의 유지가 가장 중요한데 채권단의 권한을 과도하게 강화하게 되면 기업의 경영권과 대립각이 세워지게 될 것"이라며 "또 다른 관치금융의 폐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경제단체 한 관계자는 "기업 구조조정 지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기업이 어려워지면 기업을 살리는 측면에서 보지 않고 실패한 기업인에 책임을 묻는 수단으로 보고 있다"면서 "오너 일가나 경영진 등이 잘못했으니 징벌적 성격으로 사재를 출연하거나 경영권을 내놓으라고 책임을 묻게 되면 구조조정이 잘 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기촉법이 본 취지를 벗어나 채권단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흐를 경우 현행 법정관리보다도 못한 제도가 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법정관리의 경우 회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경영권 유지도 가능해 기업이 정상적으로 영업하면서 부채 변제 계획에 따라 순차적으로 상환해나갈 수 있다.
기촉법 적용대상 기업의 경영상태는 법정관리 대상 기업보다 나은데도 법정관리보다 가혹하게 책임을 묻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법조계에서도 금융당국이 주도해 채권자 사이의 채무조정을 하는 것은 시장 기능에 의한 자율적인 기업구조조정을 촉진한다는 기촉법 본래 목적에 배치되고 공정성 확보 차원에서 문제가 된다는 입장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경영난에 빠진 기업의 대주주 일가나 경영진이 경영권 상실과 사재출연 가능성 등을 우려해 부실을 숨기거나 분식회계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단체는 조만간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등 금융당국과 정부에 이 같은 의견을 전달할 계획이다.
기업 부실의 책임을 근로자에게 묻겠다는 조항 역시 근로자측의 강한 반발이 예상된다.
이경호·박철응 기자 her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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