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한판이 남았다. 내리 세 번을 졌을 때 절망과 탄식이 넘쳤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도전은 계속됐다. 그리고 위대한 첫 승리를 따냈다. 기계와 맞서는 고독한 승부사, 인류의 대표선수, 극강의 바둑기사 이세돌이 인공지능 알파고와 벌이는 5번기. 이세돌의 투혼에 열광하고 인간의 창의성을 확인하며 위안을 받는다. 그렇지만 마음 한 구석 착잡함을 지울 수 없다. 인간이 만든 두뇌가 인간의 두뇌를 넘어서는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인가.
따져보면 알파고는 인간에 도전하는 기계의 첨병은 아니다. 이미 여러 분야에서 기계는 인간의 축적된 경험과 지능을 압도한다. 수술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린다. 진화하는 자동차 내비게이션도 그 하나다. 얼마 전 고속버스에서 놀라운 경험을 했다. 운전기사가 스마트폰의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운전하는 게 아닌가. 고속버스 운전기사라면 운전에 관한 한 프로 중의 프로다. 눈 감고도 오가는 길을 훤히 알고 있으리라고 누구나 생각한다. 그런 상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고속버스 운전기사가 내비에 의지한 이유는 딱 하나, 실시간 교통정보였다. 그는 '정체가 시작된다'는 내비의 신호가 뜨자 망설임 없이 고속도로를 버리고 우회도로를 택했다. 내비의 정보력 앞에서 오래된 운전경력이나 프로의 자존심은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러니 군인들이 내비를 보면서 운전했다 해서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군용차가 적진 속으로 돌진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영화 같은 이야기가 지난달 말 실제로 일어났다. 이스라엘 군인 2명이 스마트폰에 깔아 놓은 내비 앱을 보면서 운전하다가 길을 잃고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진입한 것이다. 주민들은 즉각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공격했다. 이스라엘군이 구조병력을 급파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불의의 유혈충돌로 2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고경위를 조사한 이스라엘 군 대변인은 "웨이즈(Waze)가 실수로 병사들을 난민 캠프로 안내했다"고 밝혔다. 웨이즈가 누군가. 2006년 이스라엘에서 개발된 내비의 이름이다. 구글이 2013년 13억달러의 거금을 주고 인수했다. 오픈소스 방식의 웨이즈는 정확성이 뛰어나 우리나라 해외여행자들도 애용할 만큼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내비다.
웨이즈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생각 없이 내비를 따라가다가 낭패를 겪은 경험이 한두 번은 있을 것이다. 지름길을 놔두고 돌아가기는 예사다. 없어진 길로 차를 이끌기도 하고, 논 밭 위를 달릴 때도 있다. 기계적 경직성과 오작동이 문제를 많이 일으킨다. 하지만 조작하는 사람의 과도한 의존과 게으름이 불러오는 '내비게이션 치매'현상도 적지 않다. 생각없이 달린다면, 최신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하지 않았다면, 내비가 어떻게 새로 난 길이나 끊어진 고가도로를 알아낼 수 있겠는가.
'내비 사건' 후 모세 야론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내비를 쓰더라도 진짜 지도로 길 찾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개탄했다. 고장난 내비만이 바른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추락하는 한국경제도 그렇다. 불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낡은 버전의 내비에 의지해 달리는 위험천만한 자동차. 지금의 한국경제 모습이다. 출범 두 달을 넘긴 유일호 경제팀의 경기대응법이 그 증거다.
전임 경제부총리 최경환은 그나마 '없던 길을 가겠다'며 내비를 사양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결국 부동산부양이란 20세기 버전을 돌렸지만.) 유일호 경제팀에서는 그런 최소한의 용기나 창의성도 보이지 않는다. 재정을 앞당겨 풀고, 수출대책회의를 다시 열고, 자동차소비세 감면을 연장하고…. 길은 낯설고, 장애물은 넘치며, 시야는 흐린데 오래된 구형 버전의 내비에 의지해 달린다.
찍어놓은 목적지는 또 어떤가. 모두가 지도에 없다는 '3.1% 성장'을 고수한다. 대통령도, 경제부총리도, 중앙은행 총재도 이렇게 말한다. "최근 경제지표를 보면, 어려운 가운데 긍정적 신호가 보이고 있다" 어떤 신호라는 얘기인가. 붉은 등인가, 푸른 등인가. '진짜 지도'로 길 찾는 법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한국경제에 알파고라도 모셔와야 하는가.
박명훈 주필 pmho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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