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 테러방지법 제정을 저지하기 위한 야당 의원들의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이 연일 화제를 이루고 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야당 의원들이 100시간 넘게 토론을 이어가며 법안 처리를 막고 있다. 앞으로 무제한토론은 어떻게 될까?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등 원내 3개 야당은 5일째 무제한 토론을 이어가고 있다. 사상 초유의 실험이 진행됨에 따라 한국 정치사상 가장 긴 토론 기록 경신에서부터 국회의장단이 피로를 이유로 상임위원장 단에 사회권을 이양하는 사상 초유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국회 바깥에서는 무제한 토론을 하는 의원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무제한 토론이 벌어지는가 하면, 무제한 토론을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방청권을 신청하는 일들까지 벌어지고 있다.
◆ 앞으로 무제한 토론은 어떻게 될까? = 야당은 테러방지법의 독소조항이 제거를 요구하고 있다. 더민주는 그동안 테러방지법 입법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독소조항 제거가 필요해서 무제한 토론을 벌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더민주는 당초의 전면적인 테러방지법 개정 주장에서 한발 물러나 '국가안보에 관련된 경우로 감청권을 제한'하는 내용의 의장 중재안 선이라면 테러방지법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물론 수사권과 추적권을 국가정보원에 둘 것인지 여부도 쟁점이다. 하지만 여당은 이미 국회 본회의에 부의된 테러방지법이 양측간의 입장이 조율된 마지노선이라는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다.
여야는 테러방지법 처리를 두고서 수면 위아래에서 협상을 이어가고 있지만 양측간의 입장차이와 감정적 간극이 크게 벌어진 상태라 극적인 타결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변수는 있다. 바로 선거구 획정이다. 4월13일 치러지는 총선은 아직까지 선거구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재외국민 투표 일정 때문에 여야는 오는 29일까지는 선거구를 국회 본회의를 열어 획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야당으로서는 선거구 획정이냐 무제한 토론 이어가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수 있게 된다. 여당은 무제한 토론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입장이다. 결과적으로 선거구 획정이 넘어올 경우 야당이 무제한 토론을 이어가기 어려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선거구 획정위원회가 28일 획정안을 의결, 국회에 제출한다면 무제한 토론 정국은 중대 변곡점을 맞을 전망이다.
◆ 무제한 토론은 야권에 기회가 될까? = 더민주 등 야당은 초기에 무제한 토론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여론이 과연 지지를 해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하지만 토론 이후 발언자에 후원금이 답지하고, 토론자가 일종의 스타가 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크게 고무된 상황이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이같은 인기가 정당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대목이다.
26일 갤럽이 조사한 2월 넷째주 여론조사에서 더민주 19%, 국민의당 8%, 정의당 3%를 나타냈다. 정의당은 전주에 비해 1%포인트 지지율이 상승했지만 더민주와 국민의당은 오히려 지지율이 떨어졌다.(23~25일 전국 성인 1004명 상대 여론조사, 95%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포인트, 응답률 23%) 이 때문에 갤럽도 "무제한 토론은 우리나라 국회사상 47년 만에 재등장한 것으로 큰 화제가 됐으나, 아직은 기존 정당 구도를 바꿀 정도의 영향 요인으로 작용하진 않은 듯하다"고 진단했다. 일단 지난 한주 여론조사 추이만 보면 무제한 토론에 대한 관심이 기지지율로 이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후 지지율 추이 변화, 정치상황 변화 등의 과정을 지켜볼 필요가 있지만, 최근 무제한 토론에 대한 국민들의 열기는 야권의 지지층 확장보다는 기존 지지층을 규합하는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29일 이후 정치상황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 가령 야당이 그토록 결사적으로 반대했던 테러방지법을 선거구 획정의 필요성 때문에 물러날 경우, 현재의 무제한 토론에 대한 열기는 반대로 독이 될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선거구획정 지연으로 인해 선거가 연기되는 사태 역시 곤혹스러운 상황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무제한 토론 정국에서 야권 지도부의 지혜로운 판단과 협상의 기술이 요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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