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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녀상입니다, 이사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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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녀상입니다, 이사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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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손선희 기자] 나는 소녀상입니다. 70년도 넘게 세월이 흘렀으나 여전히 소녀일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 치욕의 날부터 나의 생은 멈춰버렸기 때문입니다. 양주먹을 꼬옥 쥔 채 일본대사관 정문 맞은 편에 앉아있는 나는, 내 운명을 이렇게 만든 이들의 마음에 '양심'과 '양식(良識)'이 돌아와 크게 뉘우치고 내게 잘못을 사과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주름진 할머니들의 영혼 속에는 일제의 의해 전쟁터에 끌려가야 했던 딱 내 또래의 소녀들이 저마다 들어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잘못을 지금이라도 응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는 그 모습을 보고싶은 소녀입니다. 나는 앞으로 이 나라와 우리를 이렇게 만든 그 나라가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평화비'라고도 부릅니다.

4년 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가 딱 1000번째 되던 날 내 모습은 세상에 나와 햇빛을 보았습니다. 나와 같은 '소녀'들은, 과거의 범죄를 모른 체하는 일본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1992년 1월8일부터 매주 수요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의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집회를 이어왔지요. 올해 마지막 집회가 열렸던 지난 30일에 총 1211번째를 맞았습니다.

나는 소녀상입니다, 이사갈 수 없습니다 소녀상. 사진=아시아경제DB


매주 집회가 열리는 이 길 위에서 나는 오열하는 소녀들과 맞은편의 일본대사관을 하루 종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할머니들의 집회와 사연을 지켜본 어느 조각가 부부가 그 마음 속에 들어있는 '소녀'를 꺼내서 여기 의자에 앉혀놓았습니다. 귀밑으로 짧게 자른 단발머리는, 정든 고향에서 이역만리 끌려나와 외롭고 치욕스럽게 살아가야 했던 소녀의 뒷목이 얼마나 시렸는지 느끼게 합니다. 높이 130cm, 그리 높지도 크지도 않은 내가 바라보는 시선이, 건너편 대사관과 그 나라 사람들은 그리도 불편했나 봅니다. 나를 치우겠다고들 하는군요. 일본 정부는 '10억엔(약 100억원)'을 내놓으며, 나를 떠밀어내려고 애를 쓰고 있군요. 나를 치우지 말고, 그 마음 속에 있는 불편한 마음을 치울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으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왼쪽 어깨에 앉은 새는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위안부 피해자들)의 넋을 표현합니다. 끝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던 친구들의 얼굴이 그 새 한 마리에 고스란히 들어있지요. 우리나라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총 238명인데 현재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46명입니다. 그마저도 이제는 대부분 고령의 나이로, 올해만 해도 9명의 할머니가 사과 한 마디 듣지 못한 채 세상을 떴습니다. 정부가 미처 파악하지 못해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까지 합치면 그 수는 훨씬 불어날 것입니다.

나는 소녀상입니다, 이사갈 수 없습니다


땅에 딛지 못하고 살짝 들려져 있는 발꿈치는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영혼을 상징합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씻지 못할 상처는 아직 그대로거든요. 내 뒤에 드리운 그림자는 아직도 한과 비원을 풀지 못한 할머니들의 무겁고 답답한 지금의 마음이지요. 일본 정부가 과거의 범죄를 인정하고 그에 따른 법적 책임과 진정한 사죄를 하지 않는다면, 소녀는 결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옆에 마련된 빈 의자는 이 땅의 모든 사람,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나의 아픔과 나의 슬픔과 나의 고독과 나의 눈물을 이해하는 이는 곁에 앉아주십시오. 잠시 나의 시선이 되고 나의 입장이 되어 현실을 바라봐 주십시오.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 30여개의, 해외에도 10개가 넘는 평화비 소녀상이 세워졌습니다. 나아가 세계 곳곳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을 공감하는 국제 시민들이 모금을 통해 소녀상을 세워나갈 예정이라 합니다.


위안부는 세계대전 중 벌어진 일본군의 명백한 전쟁 범죄로, 그 피해자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필리핀, 네덜란드 등 세계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은 현재의 외교상황에 따라 달라질 문제가 아니며, 10억엔의 백배와 그보다 더한 현실적인 실리를 내놓는다 해도 결코 협상의 조건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손선희 기자 shees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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