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오후 6시. 애국가가 흐르고 국기 하강식이 시작된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멈추고 국기 게양대를 향해 손을 가슴에 얹는다. 심지어 베트남 전쟁터에 목숨을 걸고 돈을 벌기 위해 갈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다투던 주인공 부부마저도, 한 노인의 눈치에 눈물을 삼키며 억지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지난해 관람객 1000만명을 돌파한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이다. 기자는 바쁜 일상 때문에 뒤늦게 지난주에야 이 영화를 직접 볼 수 있었다. '블랙코미디'라는 해석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애국심이라는 엄숙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는 그랬다'는 상황의 전달, 그를 통한 웃음의 유발이 작가나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럼에도 당시 이 에피소드는 감독과 제작진의 의도와 상관없이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정작 관객들은 웃음을 터트리면서 '그냥 웃으라고 집어넣은 장면'이라거나, 당시의 국가주의 문화를 풍자한 장면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정색을 하고 나서면서 '사회적 논란'으로 번졌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한 회의 자리에서 이 장면을 거론하면서 '애국심'을 강조했다. 일국의 대통령이 상업 영화의 한 장면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최근에 돌풍을 일으키는 영화에도 보니까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애국가가 들리니까 국기배례를 하더라"며 "그렇게 해야 이 나라라는 소중한 우리의 공동체가 건전하게 어떤 역경 속에서도 발전해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논란은 영화 '국제시장'이 외화ㆍ방화 통틀어 역대 흥행 성적 1위의 자리를 석권하게 되는 원동력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받은 '애국적 감동'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속 장면을 단순한 '블랙코미디'로 넘기지 않고 '다큐멘터리'로 받아 그대로 일상 생활에서 재현하려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실제 정부는 광복 70주년을 핑계로 민주화 이후 사실상 사라진 국기 게양ㆍ하강식의 부활을 검토했다가 언론에 의해 보도돼 논란이 일자 취소했다. 학생들에게 국경일마다 태극기를 게양한 뒤 인증샷을 찍어 제출하고 일기와 소감문 등을 발표하도록 하는 등 태극기와 같은 국가상징물을 이용한 '애국심 함양' 운동을 올해 내내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국정교과서' 논란도 궁극적인 목표는 '올바른 역사관 확립을 통한 애국심 기르기'였다.
2015년 을미년, 정부가 일으킨 '애국 소동'의 '화룡점정'은 아마도 광화문광장 태극기 게양대 설치인 듯하다. 국가보훈처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광화문광장에 높이 45.815m의 대형 태극기를 꼭 꽂고 싶은 모양이다. '광복 70주년 기념'이라는 명분도 올해가 지나가면 없어지는 데, 총선을 앞둔 민감한 상황에서 굳이 행정협의조정위원회 제소라는 초강수를 둔 것을 보면 말이다.
개탄스러운 것은 이런 일들이 소위 '선진국'의 문턱에 와 있다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국가와 사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 걸까? 시민들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맺은 자유로운 계약을 통해 사회 질서를 형성한다는 루소의 '사회계약론'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겠다. 애국심이나 공동체 의식은 상징물을 내걸고 획일화된 역사를 배우고 충성 다짐을 시킨다고 생겨나는 게 아니라는 거, 이젠 모두들 다 알 때도 되지 않았나?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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