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해공 물류예술가 정석 조중훈 회장
한진그룹, 창립 70주년 맞아 전기 출간
[아시아경제 황준호 기자] "'사업은 예술이다'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1973년 10월 6일, 대한항공이 파리 직항 노선을 연 뒤 열린 파티에서 프랑스 기자가 물었다. 그의 질문은 어언 42년이 지난 2015년 10월 30일에 응답을 받았다.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의 평전, <사업은 예술이다>를 읽으면 된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사업가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기업은 능력이 아니라 노력으로 만드는 것이다. 기업은 사업가에게 예술작품과도 같다. 자신의 혼을 담아야 한다. 예술에 완성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사업은 성공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이다."
조중훈이 세상을 떠난 지 13년이 지났다. 한진그룹은 창립 70주년을 기념해 <사업은 예술이다>를 냈다. 집필자인 이임광은 조중훈이 1996년에 발간한 자서전(내가 걸어온 길)에도 담지 못한 예술혼을 이 평전에 생생하게 담았다.
조중훈의 예술은 곧 사업이었고, 모티브는 엔진이었다. 그의 예술은 엔진재생업체인 '이연공업사'를 통해 시작된다. 그러나 1943년 8월 조선총독부는 '기업동원령'을 내려 회사를 빼앗았다. 조중훈은 광복 후 두 달이 지난 1945년 11월 1일 '한진상사'를 세우고 재기한다. 남북을 합쳐도 자동차가 8000대도 안 되던 시절이다. 그는 고장난 자동차를 사들여 수리한 다음 운송업에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한국전쟁이 터져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놨다.
조중훈은 한진상사를 해체하면서 금고를 열어 직원 40여명에게 돈을 나눠주고 기계도 가져가라며 창고 문을 열었다. 직원을 챙기고 회사를 정리하느라 피난도 가지 못했다. 서울이 수복된 뒤 찾은 일터는 잿더미로 변했다. 그러나 굴하지 않았다. 그는 천막에 '한진상사' 간판을 다시 걸고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화물차를 사들였다.
미군 물자 수송은 한진그룹이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조중훈은 사업성 없는 미군 캔맥주 수송을 시작으로 미군부대에 발을 들였다. 시작부터 일이 풀리지는 않았다. '한국인은 도둑질만 한다'는 미군의 편견을 깨야 했다. 조중훈은 '신용'으로 일관했다. 그의 노력은 훗날 베트남 미군 수송물량 수주 등 한진그룹 탄생의 밑거름이 된다.
조중훈의 신용에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었다.
피에르 쉬드로는 훗날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의 최측근으로 맹활약하는 인물이다. 그는 1974년 출범한 '한불경제협력위원회'의 프랑스 측 의장으로서 조중훈을 만났다. (평전에는 1973년으로 되어 있으나 당시 신문 보도를 확인한 결과 1973년 3월 8일 KAL호텔에서 창립총회를, 같은 달 25일 파리에서 1차 합동회의를 열었다) 쉬드로는 1976년에 9월 14일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조중훈은 쉬드로를 전용기에 태워 제주도 제동목장에 초대했다. 쉬드로가 2차 대전에 레지스탕스로 참전했다가 얻은 지병 때문에 장거리 여행이 어렵고, 평소 목장에 로망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쉬드로는 조중훈의 친구가 됐다. 조중훈은 훗날 오일쇼크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때 쉬드로의 도움에 힘입어 건강검진표 한 장 만으로 프랑스 소시에떼 제네랄 은행으로부터 5000만 달러를 조달했다. 고리원자력발전소 4호기의 핵심기술 협력 등도 이루어냈다.
조중훈은 사람을 얻기 위해 사람을 믿었다. 그는 한불경제협력위원회를 이끌면서 프랑스에 정통한 일꾼을 채용하기 위해 중앙정보부에 각서를 썼다. "이 청년이 시국 관련 문제를 일으켜 처벌을 받게 된다면 나 역시 같은 처벌을 받겠소." 청년은 프랑스 유학 중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사상범으로 투옥됐다 풀려나온 사람이었다. 우리나라에 프랑스 유학파가 드물던 시절이었다. 조중훈은 아무 편견 없이 청년의 능력만 보았다. 청년은 훗날 조중훈이 각서를 썼다는 사실을 알았고 헌신적으로 일했다.
이렇게 하나 둘 '사람'을 얻은 조중훈은 이내 '작품'에 몰입했다.
조중훈은 1969년 1월 부채가 27억원에 달하는 '부실덩어리' 한국항공공사를 인수한다. 임원들을 설득해야 했다. 그들은 제조업 등 당시 잘 나가던 사업에 뛰어들자고 했다. 그러나 조중훈은 육지와 바다 뿐 아니라 하늘까지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인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사업이면 만 가지 어려움과 싸워가면서 나가는 게 기업가의 진정한 보람 아니겠는가"
한국항공공사를 인수한 조중훈은 감원 대신 교육을 택했다. 자르는 대신 깎아냈다. 성과급제를 도입하고 사내 교육 문화를 정착시키는 등 당시에는 생소한 선진 조직 운영 시스템을 도입했다.
한진해운도 조중훈의 손길로 깎고 다듬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해운업은 1978년 2차 오일쇼크 이후 1980년대 말까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86년 한진그룹 회장의 집무실에는 한진해운의 경영보고서만 올라가지 않았다. 완전 자본잠식에 대처할 방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중훈은 그해 5월 대한항공의 경영 DNA를 한진해운에 심기로 결정했다. 조직을 대폭 축소하고 인력의 20%를 대한항공으로 보냈다. 또 대한항공과 같이 종합통제센터를 신설해 선박들을 24시간 관찰했다. 저 유명한 '5월의 결심'이다. 이후 1년 만에 한진해운은 대한항공 위탁 경영에서 벗어났다.
조중훈 평전 <사업은 예술이다>는 읽는 재미가 있다. 사업을 예술로 승화시킨 사나이의 꿈과 희망을 정제해 냈다. 평전은 그의 죽음을 끝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이임광은 '아직 그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며 그를 놓지 못한다. 대한민국 물류 대동맥에 끝이 존재하지 않듯, 그의 꿈과 희망이 한진그룹 속에 살아 숨 쉰다는 뜻이리라.
조중훈의 손녀인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32)는 "(할아버지는) 가장 이상적인 롤 모델이지만 가장 따라 하기 어려운 분"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업은 예술이다>를 통해 저보다 더 나은 영감을 받을 것"이라는 소개도 잊지 않았다.
황준호 기자 rephwa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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