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현준 골프전문기자] "1년, 4대 메이저, 연속."
'그랜드슬램(Grand Slam)'의 필수조건이다. 골프역사상 '구성(球聖)' 보비 존스가 1930년 유일무이한 대기록을 작성했다. 하지만 당시 4대 메이저는 2개의 오픈(US오픈과 디오픈)과 2개의 아마추어대회(US아마추어와 브리티시아마추어)로 구성됐다. 마스터스가 창설된 1934년 이후 현대적 의미의 그랜드슬램은 여전히 전인미답의 땅이라는 이야기다.
워낙 어렵다보니 '1년과 연속'을 제외하고 언제든 서로 다른 4대 메이저를 모두 제패하는 순간 '커리어 그랜드슬램'이라는 이름으로 높이 평가한다. 실제 남자는 지난 81년 동안 딱 5명, 여자는 지난 3일 브리티시여자오픈을 제패해 마지막 퍼즐을 맞춘 박인비(27)까지 7명이 전부다. 박인비의 위업이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골프채널 등 미국 언론들은 그러나 "2013년 메이저로 승격한 에비앙챔피언십까지 우승해야 진정한 커리어 그랜드슬램"이라고 시비를 걸고 있다. "그랜드슬램의 어원은 브릿지게임의 패 13장을 모두 따내는 압승"이라며 "모든 메이저를 다 우승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야말로 난센스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의 기형적인 시스템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바로 LPGA의 '꼼수'가 출발점이다. 2013년 스폰서 에비앙의 요구에 굴복해 5개 메이저 체제라는, 흥행을 위해 역사를 왜곡시키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박인비가 당시 나비스코와 LPGA챔피언십, US여자오픈을 차례로 쓸어 담아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사상 초유의 그랜드슬램에 근접하자 서둘러 "4개 우승은 그랜드슬램, 5개 우승은 슈퍼슬램"이라는 억지를 곁들였다.
이 논리에 따르면 박인비는 비록 브리티시여자오픈 우승이 무산됐지만 에비앙 우승으로 다시 한 번 그랜드슬램이라는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었다. 골프계에서 "에비앙은 '제5의 메이저'로 충분했다"며 LPGA투어의 무리수를 질타한 이유다. '은퇴한 골프여제' 아니카 소렌스탐은 "그랜드슬램은 무엇보다 연속의 의미가 아주 중요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박인비의 커리어 그랜드슬램은 오히려 그 순도 면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미국 언론들은 박인비가 브리티시여자오픈을 건너뛰고 에비앙에서 우승했다면 일어날 수 있는 엉뚱한 이의 제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박인비 역시 "(내가) 미국선수였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며 "에비앙은 이미 2012년에 우승한 무대"라고 일축했다.
메이저 역사가 일천한 LPGA의 '슬램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 혼선을 빚을 전망이다. '커리어 슈퍼슬램'을 달성했다는 카리 웹이 대표적이다. 1999년 듀모리어클래식 우승 이후 4개 메이저 트로피를 더 수집했지만 브리티시여자오픈이 듀모리에를 대신해 메이저로 승격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과적으로 같은 대회다. 돈벌이에 급급한 LPGA투어가 만약 메이저를 6개로 늘리면 어떻게 될까. '메가슬램' 또는 '울트라슬램'까지 나올 판국이다.
김현준 골프전문기자 golf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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