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7월 서울대 특강에서 한국과 중국이 일본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운 역사를 강조하며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을 언급했다.
진린은 광둥(廣東)성 출신이다. 명나라 수병도독으로 1597년 수군 5000명을 이끌고 강화도에 도착했다. 유성룡은 진린이 성격이 포악하고 남과 어울리지 못한다며 그가 이순신의 권한을 인정해주지 않고 군사를 제 마음대로 다뤄 일본에 패할 듯하다고 염려했다. 진린은 1598년 남해 고금도로 내려와 이순신과 합세했다.
이순신은 진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들을 시켜 잡아온 사슴과 멧돼지, 물고기로 큰 잔치를 벌였다. 진린은 흡족해했다. 그는 이순신의 작전을 따랐고 이순신은 전투의 공을 모두 그의 몫으로 돌렸다. 진린은 이순신에게 감복하게 됐다. 그는 명나라 만력제에게 "통제사는 천하를 다스릴 만한 인재요, 하늘의 어려움을 능히 극복해 낼 공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해 11월 진린은 이순신과 함께 노량해전을 치렀다. 진린은 왜군이 패주한 뒤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의자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통곡했다고 유성룡은 '징비록'에 적었다.
이후 270년 뒤 일본은 메이지(明治)유신으로 근대화에 나서며 군사력을 키운다. 해군 전력에 자신이 없었던 일본은 적장 이순신을 연구했고 대단히 존경하게 됐다. 일본 해군은 이순신의 학익진 전법을 응용해 1894년 청일해전과 1905년 러일해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러일해전에 앞서 일본 도고(東鄕)함대가 러시아 발트함대를 진해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출동할 때였다. 도고함대의 수뢰사령(水雷司令) 가와타 쓰도무(川田功) 소좌는 이순신 장군의 영(靈)에게 빌었다며 이렇게 적었다.
"(전략) 마땅히 세계 제일의 해장인 조선의 이순신을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인격, 그의 전술, 그의 발명, 그의 통제력, 그의 지모와 용기, 그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상찬의 대상이 아님이 없다."
일본 역사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책 '한나라 기행'에서 이 일화를 소개하고 "그 뒤로도 이 전통은 이어졌다"며 "해군 대장을 지낸 마사키 이쿠토라(正木 生虎)와 야마야 타닌(山屋他人) 등도 그랬다"고 전했다.
다시 110년이 지났다. 충무공이 태어난 지 470년이 흐른 오늘, 그가 태어난 중구 건천로 일대를 걸으며 그를 기렸다. 명보아트홀 앞에는 그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작은 표석이 놓여 있다.
백우진 디지털뉴스룸 선임기자 cobalt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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