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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조문보(弔問報)라는 장례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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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조문보(弔問報)라는 장례 형식 백우진 디지털뉴스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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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슬프도다.


사람의 마음으로서 죽음보다 더한 슬픔이 없으며, 삶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다.

그러나 나는 살았음을 즐거워할 수 없으니, 그것은 너희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기 때문이다.


오호, 고금의 유구한 세월 속에 같은 세대에 태어났으며 하늘과 땅이 넓고 넓은데 한 동네에 살았으니, 비록 어림과 어른의 다름이 있고 신분의 높고 낮음이 있다손 치더라도, 맺어진 인연으로 해서 그 정은 바로 형제와 다름 없고 그 의로 말하면 동포와 같다 할 것이다."

조선 후기 문신 장한철(1744~?)이 쓴 제문(祭文)의 앞 부분이다. 그는 27세에 대과(大科)에 응시하러 제주항을 떠났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고 무인도에 정박하는 등 온갖 고생을 한 뒤 그 이야기를 책 '표해록(漂海錄)'으로 남겼다. 위 제문은 이 책에 나온다.


한 배에 탄 사람들 중 21명이 물에 빠져 유명을 달리했다. 남은 일행은 청산도에 표착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해 아침밥 스물한 상을 차려 바닷가 언덕머리에 벌여놓고 바다쪽으로 각자의 지방(紙榜)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제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하물며 만리풍도에 외로이 떠다니던 배는 언제 가라앉을지 모르고, 한 가닥 생명은 아침 이슬과 같이 간들거리고 있었으니, 내가 살면 그대가 살고 그대가 죽으면 나도 또한 죽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대들이 바다에서 폭풍에 휩쓸려 날려가도 붙잡지 못했고 해안 근처에서 물에 떨어져 빠졌는데도 살려내지 못했으며 깎아지른 절벽에서 발을 헛디뎌 바다로 떨어졌는데도 구해내지 못했다.


오호, 슬프구나. 다같이 죽을 고비를 넘나들 때에 그 정이 두텁지 않음이 없었는데, 오늘 이와 같이 사생을 달리하였으니, 이는 어찌 사람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리요." (하략)


나는 조선시대에 차린 '예(禮)'를 대부분 허례허식이라고 보면서도 이 제문의 형식과 같은 고인을 기리는 의식(儀式)은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장례식장에서 고인이 어떤 분인지도 모른 채 상주나 조문객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시간을 보내다 나오는 게 아쉬웠다. 현대사회에서 고인과 가까웠던 지인들이 한 시간에 모여 제문이 낭송되는 가운데 유족들과 함께 슬픔을 나누기란 쉽지 않으리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빈소에 문상객들이 영정 외에 고인을 추모할 무언가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혹 장례를 치른 상주(喪主)가 답례 글을 통해 "고인이 돌아가시는 길을 함께 해주시어 감사하다"며 고인이 어떤 분이었는지 간략하게 적어 보내는 경우도 있다. 나는 고인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행장(行狀)을 빈소에 놓아 조문객이 이를 보고 고인을 추모하도록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행장 외에 제문에 해당하는 추도사를 함께 갖춰놓으면 더 격식이 차려질 듯하다.


그런 아쉬움을 없애고 이런 바람을 실현하기 위한 움직임을 최근 접하게 됐다. 고인을 기리기 위한 '조문보(弔問報)'라는 인쇄물이 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봤다. 조문보에는 고인의 약전(略傳)과 유족들의 이름과 나이, 가족사진이 실린다. 유족들은 조문보를 통해 장례 일정을 알리고 문상객들에 대한 인사를 올린다. 고인에 따라서는 추모시와 추모사, 조문객들의 조사(弔詞)가 실리기도 한다.


조문보를 제작하는 곳은 협동조합 은빛기획이다. 은빛기획은 지난해 9월 이 일을 시작해 가수 신해철, 경제학자 김기원, 언론인 성유보의 조문보 등을 펴냈다. 노항래 은빛기획 대표는 "모인 조문객들이 고인을 추모하는 뜻을 함께 하는 장례문화를 만들고자 한다"고 조문보를 제작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내용이 형식보다 우선이지만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기도 한다. 조문보라는 장례 의식이 널리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면 고인은 뒷전이고 상주도 제대로 위로하지 못하는 우리 장례문화의 내용도 달라지리라고 본다. 






백우진 디지털뉴스룸선임기자 cobalt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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