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으로 기억되는데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라는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 이 책을 사서 읽어 본 이들 가운데에는 그 도발적인 제목에 뭔가 끌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얘기할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야 그 서명(書名)이 어느 프랑스 시인의 시에서 따온 것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이 제목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면 그건 아마 많은 이들의 마음의 저층에 감춰진 정서, 그것과 공명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이 나왔던 때는 특히 금지명령과 훈령이 많았던 시대의 끝자락이었고 그래서 더욱 대중의 마음을 잡은 것이기도 했지만, 금지는 단지 금지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거부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금지에 대한 거부에는 어떤 숭고함이 있다고도 했을 것이다.
금지된 것, 금기를 넘어서 보고 싶은 욕망은 사회가 쳐 놓은 울타리를 뛰어넘고 싶은 것, 결국 자기 자신이 자신의 내면에 그어 놓은 선 바깥으로 넘어서 보려는 욕망이다. 스스로 쳐 놓은 철조망을 걷어내고 미지의 영역으로 가 보는 모험이고 도전인 것이며 그래서 삶의 한 획기(劃期)가 되는 것이다. 우리네 삶이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또한 죽어가는 것이기도 한다면 그 죽음 속에서의 한 부활이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회가 많은 금기로 이뤄져 있다고 할 때 그 금기를 깨는 이들에 의해 사회는 새 생명을 얻는다. 많은 공리와 지침 속에 숨겨진 수상쩍은 금기들에 대한 순종과 훈육의 결박을 끊는 이들에 의해 그 사회는 '안정'이라는 이름의 죽음 속에서 벗어난다.
봄기운이 퍼지는 요즘은 많은 이들이 새로 시작하며, 그럼으로써 어떤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때다. 처음으로 학교에 들어가고, 대학에 들어가면서 성인으로 진입하며, 학업을 졸업하고 동시에 사회에 '입학'한다.
이들의 소명은 오랫동안 한 사회가 이룩해온 전통과 문명을 배우고 잇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완전한 역할은 또한 자신들의 스승을, 낡은 사고를 이끌 때 완수된다. 배우면서 또한 가르칠 때 달성된다. 그럴 때 사회는 세월의 흐름을 이겨내고, 죽음을 거역하는 것이다. 준법과 함께 스스로 '입법(立法)'할 때, 그럴 때 이들은 사회의 전위가 돼야 할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금'과 함께 '금금'이 이들의 구호가 돼야 하지 않을까. 40여년 전 많은 젊은이들처럼 '모든 금지를 금지한다'는 '금금(禁禁)'이 돼야 하지 않을까.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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