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맨은 배트맨의 변종일까. 괴수나 악당을 물리치는 슈퍼히어로를 기대하고 있었다면, 철학적 냉소와 자아분열로 뒤엉키고 찢어지는, 그야말로 ‘새’ 된 한 남자의 좌충우돌기(記) 앞에서 당혹스러울 것이다. 빌딩이 부서지고 지구가 흔들리는 전투도 없고, 새처럼 하늘을 나는 호쾌한 비상도 찾아보기 어렵다.
영화 ‘버드맨 시리즈’로 명성을 날린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이 연기했다)은 시리즈 4편의 출연을 거절당한 뒤, 잊혀진 배우가 되었다. 그의 청춘은 버드맨이었고 그의 삶의 빛나는 엑기스도 버드맨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버드맨으로 살아갈 수가 없는 현실에 봉착했다. 열광하는 관객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머리숱이 휑한 이마와 쭈글쭈글한 중년의 실패남이 거울 속에 들어있을 뿐이다.
그는 메소드 배우(Method Actor)였다. 현실의 삶과 극중인물이 하나로 되어버린 극사실(極寫實)의 연기 속에 살아왔다. 그런데 현실이란 한 축이 무너지고 자신이었던 극중인물은 떨쳐지지 않는 기억의 고집 속에서 자기를 끊임없이 조롱하는, 늙어가는 인생이 되었다. 영화는 자기였던 자기와 자기를 벗고자 하는 자기가 좌충우돌하는 가운데, 지금과는 다른 비상(飛上)을 꿈꾸는 버드맨의 몸부림을 다룬다. 영화 속에서 그는 날았지만, 이제 그는 걸어가기를 원한다. 아니 지금도 날아가고 싶지만 걸어가는 것만 허용될 뿐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향해 쏟아진 찬사는, 화려하고 다중적인 영화언어(cinematographic language)나 멕시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자전적인 정체성 탐구, 혹은 슈퍼히어로의 상업영화로 내면없는 하늘을 날아온, 할리우드 내부의 자기통증을 통렬하게 드러낸 상징성에도 있겠지만, 이같은 영화에 아카데미상을 무더기로 안겨준 외형적 갈채에도 영향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을 매료시키는 스토리의 짜임새나 혹은 관념의 충격을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영화방식들을 기대하는 ‘보통의 안목’들에겐, 날지 않는 버드맨의 답답한 낮은 포복이 썩 재미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버드맨이었던 늙어가는 배우 리건은 연극 제작자 및 배우로 인생2막을 열려고 노력 중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원작으로 한 연극이다. 미국의 단편소설 르네상스를 일으켰다는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들은 중산층의 미묘하고 복잡한 심리를 묘파하는 작품들로 유명하다. 연극은 아내에게 배신당한 남자의 충동적 자살을 다룬다. 리건은 이 작품을 만들면서 몇 겹의 자의식과 충돌하며 싸운다. 첫째는 세상을 떠들썩하게한 스타였던 자아와, 돈 없는 무명 연극인으로서의 자아가 부빙처럼 떠다니며 수시로 부딪친다. 거기다가, 상업영화의 성공자와 예술영화의 초짜(둘 다 리건의 자아이다)가 서로를 무시하거나 조롱하며 대치한다. 거기다가 현실을 각성시키는 딸(샘, 엠마 스톤)과 인기 연극배우 마이크 샤이너(에드워드 노튼이 연기)가 그의 분노와 절망을 자주 불러낸다.
마이크 샤이너는 영화 속에서 아주 독특한 존재이다. 그 또한 메소드 배우라 할 수 있다. 삶과 연극을 동일시하며, 연극 속에서 오히려 살아있음을 느끼는 ‘현실 부적응자’이다. 버드맨은 이 연극스타를 보면서 보고싶지 않은 자아를 만나기도 하고, 또 연기배우로 거듭나고 싶은 욕망을 가로막는 훼방자를 만나기도 한다. 리건은 출혈을 감수하고 그를 연극에 끌어들였지만, 마이크는 리건이 통제할 수 없을만큼 분방한 자기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로 인해 시사회는 뒤엉키기 시작하고 연극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꺼지면서 오히려 마이크에 대한 열광만 커지는 이상한 상황을 맞는다.
딸 샘 또한 리건에겐 실패인생의 담장을 걸어가는 아슬아슬한 존재이다. 꽃을 가리키며 퍼킹 김치냄새가 난다고 말한 그, 문제의 소녀이다. 그 김치냄새는 발효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일 것이다. 썩어간다는 것은, 시간과 변질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숙성이라는 의미도 있다. 리건의 삶은 저 퍼킹 김치의 고뇌에 봉착해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는 발효인생으로 내딛어야 하는 ‘김치콤플렉스’에 빠져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샘은 아빠 리건에게 이렇게 퍼붓는다. “솔직히 아빠는 예술 때문에 지금 이 짓 하는 거 아니잖아. 또다시 뜨고 싶고 유의미해지고 싶으니까 그런 거지. 아빠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죽도록 무섭고 싫으니까 이러는 거 아냐? 근데 그거 알아? 그 말이 맞다고! 아빠 삶은 의미 없어. 이것도 중요하지 않아. 아빤 중요하지 않다고! 그냥 좀 받아들여!” 물론 리건도 저 연극과 자신의 불일치를 알고 있다. 사람들이 피 튀는 것을 좋아하고 액션을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이런 “개떡같은 우울한, 철학 헛소리”는 거들떠 보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저 버드맨의 삶 속에서도, 여기 레이먼드 카버의 삶 속에서도 ‘무의미한’ 뻘짓들로 관철하고 있는 인생이라는 자책에 꼭지가 도는 것이다.
영화가 작심한 듯한 구취(口臭)를 풀풀 풍기는, 비평가에 대한 적개심은 영화감독 이냐리투의 ‘내면’의 일부이겠지만, 리건 톰슨의 삶을 관통하는 콤플렉스이기도 하다. 대중은 그를 명망의 하늘을 날게 했지만, 비평은 그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그가 만들려던 연극 또한 비평가의 집요하고 악랄한 ‘입’에 의해 쓰레기처럼 내동댕이쳐질 위험에 처한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리건의 공중부양은 관객을 살짝 당황하게 한다. 그리고 이 영화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오판하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창가로 다가간 리건은 공중의 새를 보더니 난간에 올라선다. 이후 샘이 병실에 들어오고 사라진 리건을 찾는다. 샘의 표정을 봐서는 자살하려고 뛰어내린 건 아닌 것 같다. 어디로 갔을까. 소녀의 시선은 허공을 향한다. 이 영화는 결코 초능력이나 슈퍼맨을 그린 영화가 아니지만, 초능력과 슈퍼맨이 없었더라면 태어날수도 없는 영화이다. 영화에서 연극으로, 연극에서 다시 영화로, 스토리는 뫼비우스의 띠를 이룬다.
나는 영화제목인 버드맨을 버드(bird)와 맨(man)으로 읽는다. 리건이 지닌 버드의 무의식과 맨의 꿈이 현실과의 불화 속에서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스크린의 행간을 날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영화를 안 본 독자들의 궁금증을 채워주려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다만 할리우드의 대중이 꽤 철학적이면서도 시니컬한 유머들에서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일감(一感)을 전하고 싶은 건지 모른다.
이상국 편집부장·디지털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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