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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잔소리 중단 선언

시계아이콘01분 08초 소요

"쇼핑백 좀 갖다 줘. 세탁기 옆에 있어."
명절을 앞두고 다소 분주한 주말, 아내의 한마디에 명절증후군 최소화에 대한 부담감에 총알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있어야 할 쇼핑백은 보이지 않았다.


"안 보이는데…, 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야?"
"세탁기 옆에 없어?"하며 짜증 섞인 말투로 부엌으로 오는 아내에게 "없다니까 그러네"라고 답한 후 되레 화를 내려는데 아내는 내가 찾고 있던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맙소사! 내가 투덜거리며 쇼핑백을 찾던 곳은 세탁기가 아니라 김치냉장고 옆이었다. "김치냉장고 옆이라고 한 것 아녔어? 예전엔 김치냉장고 옆에 있었는데…."

풀이 죽어 한마디 하자 아내의 잔소리는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당신은 말을 있는 그대로 듣지 않고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고 꾸짖었다.


엄마가 아빠를 혼낼 때면 어김없이 엄마 편을 드는 작은 아들도 거들었다.
"지난 번에도 오븐 위에 있다고 했는데 전자레인지 위에서 찾느라 못 찾았잖아."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맹공을 펼치는 모자의 공세에 버럭 화를 낼까도 싶었지만 다가오는 설을 위해 꾹 참았다.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잔소리는 다소 억울한 면도 있었지만 대부분 맞는 말이었다.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뭘 찾으라고 했을 때 제대로 찾은 적이 별로 없었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셨다. 어머니는 물건 못 찾는 게 집안 내력이라며 타박하셨었다. 다만 워낙 가부장적이셨던 아버지께 잔소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21세기 신여성인 아내는 어머니와 달랐다. 가장의 체면을 봐 적당히 마무리하는 대신 오히려 비판의 범위를 남편을 넘어 사회의 기득권층 전반으로 확장시켰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니 기층민의 현실이 제대로 전달되겠냐고 했다.


10여년간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달라지지 않아 이젠 잔소리도 아깝다는 마무리 멘트까지 꿀먹은 벙어리처럼 듣다 보니 딱히 틀린 말이 없었다. 귀를 열고 살았다지만 실제로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선입견이 또아리를 단단히 틀고 있었다.


살면서 남의 얘기에 귀를 잘 기울이며 살았다고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와 달리 민주적인 가장이었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잔소리를 그만하겠다는 선언을 들을 정도로 가정 내에서 소통 점수는 낙제점이었다. 나만 그걸 몰랐다.


'소통'이 화두인 시대. 그만큼 소통 잘한다고 믿는 리더들의 '불통'이 심각하다는 뜻이 아닐까.


전필수 증권부장 phil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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