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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모두에게 이로운 정책을 펴는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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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모두에게 이로운 정책을 펴는 이들에게 박성호 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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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군 복무 시절, 우리 중대장이 결단을 내렸다. 대대본부 막사에서 식당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약간 굽어 있었다. 중간에는 조그만 화단이 있었는데 병사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편하게 오가기를 원했다. 불과 스무 걸음 정도 되는 거리를 돌아가기 싫어 이 화단을 짓밟는 일이 잦았다. 군홧발에 생채기가 난 화단을 새로 가꾸는 일은 고단했다. 중대장은 대대장에게 건의하기로 했다. 차라리 화단을 가로지르는 조그만 길을 만들자고. 길을 낸 후 중대장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모두가 원하는 길을 만들어주는 게 바로 창의성이고 이로 인해 대대원 모두가 편하게 됐다."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일주일, 한 달이 지나며 그 길 주변에 있는 화단도 무사하지 못했다. 떼거리로 오가는 수백 명의 병사들에게 그 지름길은 너무 좁았다. 결국 어렵사리 낸 길을 다시 화단으로 원상 복구했다.

명성과 권력을 얻었다 싶은 정치인과 관료들에게는 어김없이 큰 유혹이 다가온다. '모두가 원하는 걸 알고 있고 해줄 수 있다'는 자기세뇌적 신념이다. 평상시에는 착각이고 몽환적 사고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조그만 권력이라도 손에 쥐고, 지지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하면 이를 실천할 수 있다는 무모한 믿음으로 충만해진다.


최근 금융ㆍ경제계의 화두는 '투자'다. 정부는 재계에 투자를 독려하다 못해 국민의 돈이 차곡차곡 쌓여진 시중은행에 무형의 담보를 믿고 기업에 대출해 줄 것을 안달복달한다. 대출기업에도 좋고 신성장동력을 발굴하지 못하고 있는 은행에도 이로운 '만병통치약'인 셈이다.

하지만 현실을 보자. 재계의 현황을 보면 투자가 늘어도 정부가 바라듯 국내투자 활성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폐쇄적이라는 일본의 대기업들과 비교만 해봐도 알 수 있다. 혼다는 자산의 74.7%, 판매의 79.5%가 해외에서 이뤄지며 채용 인력의 60.1%가 일본 열도 밖에서 일을 한다. 도요타 역시 자산의 58.7%, 판매의 63.3%, 채용의 37.3%가 해외 몫이다. 반면 현대차의 해외자산은 31.1%에 불과하고 해외판매는 겨우 50%를 넘어선 정도다. 현지채용은 28.7%에 그친다.


삼성과 소니를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해외자산 비중은 소니가 46.6%, 삼성이 36.2%다. 해외채용 인력은 소니가 64.1%에 달하지만 삼성은 46%에 그친다. 삼성과 현대차만 놓고 봐도 국내보다는 해외투자가 활발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 내수 규모는 일본의 절반에도 안되기에 당연한 일인데 정부는 '투자'를 외치고 있다. 그러니 기업들은 '전네후킁(앞에서는 '네', 뒤에서는 '콧방귀')'할 수밖에.


금융부문은 더 답답하다. 지금 정부가 지분을 가지고 있는 소매은행은 우리은행, 기업은행 정도다. 그나마 정부지분을 현찰로 바꿔 나라 곳간에 쌓겠다는 절차가 진행 중이다.


나머지 시중은행의 주주는 과반 이상이 모두 외국인들이다. 그 안에 있는 국민들의 쌈짓돈이 쌓여있다. 당국은 부실을 내도 절차만 지키면 관련 직원 문책을 면해준다고 공언했다. 수익을 내야 하는 시중은행들이 정작 겁내는 건 대출부실이지 직원 문책이 아니다. 세금을 퍼부어 은행을 살린 때가 엊그제인데 지금은 '만병통치약'이 있는듯 주장한다.


한 발 더 나가보자. 정부는 빚내 집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줬고 아예 이참에 신혼부부에게 집을 한 채씩 주는 정말 혁신적인 아이디어도 나왔다. 그동안 빚을 못 내서 집을 안 샀고 아이 키울 공간이 없어 출산율이 이렇게 낮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모두에게 이로운 이런 정책에 국민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고대 아테네 민회에는 '도편추방제'(Ostracism)가 있었다. 투표 때 도자기 조각에 독재를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적었는데 6000표 이상을 얻은 사람은 10년 이상 아테네를 떠나 있어야 했다. 정치나 관료사회에서 10년 이상 떠나 있어야 하는 한국판 도편추방제를 도입하는 건 어떨까 싶다.






박성호 금융부장 vicman120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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