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병원에서 수술을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간호사가 불쑥 들이미는 수술 동의서에 적힌 살벌한 내용을 읽어 봤을 때 얼마나 당혹스러워지는지를. 요약하자면 "수술을 받다 죽을 수도 있으니 알고 있으라, 의사나 병원의 책임은 없다"는 게 동의서의 주요 내용이다.
물론 수술이 잘 끝나면 다행이다. 그러나 병원에 멀쩡히 걸어 들어와 몇 시간 전까지 웃으며 대화를 나눴던 환자가 수술대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도 꽤 있다. 요즘 같이 발달된 의료기술ㆍ최첨단 의료기구가 있는 시대에 무슨 소리냐고? 한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2010년 한해 우리나라에서 의료사고(로 주장되는) 사망자는 약 4만명이나 된다. 교통사고 사망자 6830명의 5.7배, 산업재해 사망자 2089명의 18.7배나 된다.
얼마 전 돌연 사망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 가수 故신해철씨에 대해서도 그럴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는 지난 10월17일 장협착으로 수술받았다가 열흘 후인 10월27일 수술 중 장천공 발생 등에 의한 폐혈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족들의 요청에 의해 그를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측은 의료 사고로 인한 사망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는 1차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유명인이기 때문에 그나마 진상 조사가 가능했다. 일반인은 꿈도 못 꾼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그만큼 일반인들이 의료 사고를 입증해 피해를 보상받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의료 사고 여부를 가릴 수 있는 핵심 증거인 진료 기록부 작성ㆍ관리가 너무 허술하다. 수술한 의사가 직접 진료 기록부를 작성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진료 기록부는 사실상 수술시 의료진의 과실 여부를 판정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인데, 수술한 사람이 직접 작성하기 때문에 과실을 밝혀 내기는 매우 어렵다. 표준화된 양식조차도 없다. 전문가들은 진료 기록부를 수술자가 아닌 제3자가 하도록 하고 양식을 표준화하는 한편 동영상ㆍ사진 등을 통해 수술 전체 과정을 꼼꼼히 기록해 두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의료 사고가 발생할 경우 과실 여부 입증을 피해자 쪽에 떠넘기는 제도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도 많다. 우리나라는 피해자 입증주의로 인해 의료심사조정위원회가 유명무실화되자 2012년 4월부터 독립적 중재기관인 '한국의료사고분쟁조정중재원'을 출범시켰다. 피해자 측이 조정을 신청하면 중재원이 과실 여부를 판단해 병원 측과 조정ㆍ중재를 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이 역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긴 마찬가지다. 개원 이래 조정개시된 1380건 중 단 3건만을 처리해 성공률이 0.2%밖에 되지 않는다. 강제 조정이 아니라 임의 조정이어서 의료기관들이 조정에 응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의료사고의 '물증'인 검사 결과와 각종 신체지표 등 데이터의 보관 및 공개가 의무화돼 있지 않는 것도 시급히 개선해야 할 과제로 꼽히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문분야'라는 이유로 의사들이 쌓아 놓은 장벽을 걷어 내는 일이다. 사람 목숨을 다루는 일인 의료 행위의 과정ㆍ결과를 보다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감시ㆍ검증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적 당위성을 가진 명제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는 의사 출신 국회의원들과 막강한 힘을 가진 의료 단체들의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인해 '죽은 사람만 억울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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