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고노 담화를 검증하겠다"고 발언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퇴행적 보수 회귀로의 길을 선택한 아베 정권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은 "(위안소 문제는)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준 문제로서 (일본)정부는 허다한 고통을 경험당하고, 심신에 걸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일본의 이 같은 전향적 반성 때문에 그동안 한일관계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우호적인 상황이 계속됐다. 발전적으로 지속돼온 한일관계가 냉각된 것은 아베 신조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다. 스가 장관의 발언으로 난리가 나자 아베 총리는 '고노 담화'를 수정하려는 생각은 없다고 부인했지만 관방장관이 총리와 교감 없이 돌출 발언을 했을 리는 없다. 스가 장관을 통해 일단 한 번 '질러보고' 그 반응 여하에 따라 추가 행동을 결정한다는 양동작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노 담화가 발표된 시점은 1993년,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이다. 아베 정권은 왜 이제 와서 고노 담화로 상징되는 일본의 반성을 부인하고 국제사회의 비난을 자초하는 퇴행적 보수의 길을 택한 것일까. 역사적으로 극단적 보수 정권은 경제불황과 맥을 같이 한다. 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인한 초(超)인플레이션은 히틀러 정권을 낳았고, 이태리의 경제 불황은 무솔리니 파쇼 정권을 잉태했다. 경제의 장기 불황과 고용불안으로 부정적 에너지가 쌓이기 시작하면 반드시 이를 이용하려는 극단적 정치세력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내부의 경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니 외부의 적을 만들어 폭발 직전의 부정적 에너지를 공격의 화살로 전환하는 것이 공통점이다. 아베 정권의 돌출 행각도 장기 불황과 후쿠시마원전 사태로 누적된 사회경제적 불안감과 불만이 빚어낸 정치적 결과물로 비쳐진다. 아베 총리는 집권하자마자 엔화를 무제한으로 찍어내 경제를 살려보려고 했지만 부작용만 냈을 뿐 경제 회생에 실패했다. 2013년 초 경제성장률이 잠깐 반짝 했지만 하반기 들어 0.2%로 다시 주저 앉았다. 풀린 돈 때문에 물가만 올라 실질임금이 낮아지면서 소비가 냉각됐고, 약화된 엔화가치 때문에 경상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경상수지는 지난해 10월 이후 4개월 연속 적자행진을 지속하고 있고, 올 1월에는 무려 1조5890억원의 적자를 냈다.
이처럼 쪼그라드는 경제 속에서 과거의 화려했던 영화를 그리워하는 극단적 보수 회귀 정치세력이 아베 정권을 만들어내고 한국과 대립각을 세워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보통 사람들의 관심을 쏠리게 함으로써 정부에 대한 불만을 교묘하게 호도하는 작전을 펴고 있다고 보는 것도 지나친 해석은 아닐 것이다.
아베 정권의 불안한 정치 기반과 돈키호테식 행각의 이면을 읽고 나면 우리의 선택은 명백해진다. 한국을 외부의 적으로 설정한 아베 정권의 도발에 냉정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베 정권은 결코 일본의 전부가 아니다. 일본에서는 '고노 담화'와 일본의 식민 지배 침략전쟁을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의 계승 발전을 지지하는 지식인 그룹들이 대대적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보수 성향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아베 정권의 지나친 돌출 행각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베 정권은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는 퇴행적 보수 정당의 하나일 뿐이다. 일본과 아베 정권을 동일시하는 것은 바로 아베 정권이 바라는 정치적 책략에 말려드는 것일 수도 있다. 발전적이고 지속적인 한일관계가 계속되려면 한국이나 일본이나 과감하게 아베 정권을 넘어서야 한다.
홍은주 한양사이버대 경제금융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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