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양성희 기자]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유서대필 사건’의 강기훈씨가 1992년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지 22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판사 권기훈)는 13일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돼 옥살이를 했던 강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검찰의 증거만으로 피고인이 유서를 대신 작성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발견된 유서의 필적이 피고인의 것과 같은지 여부인데, 유서의 필적과 피고인의 필적이 동일하다고 본 1991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감정은 신빙성이 없으며 이 사건의 유서를 김기설씨가 직접 작성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91년 국과수 감정인은 필적감정 일반원칙에 위배해 속필체인 유서와 정자체인 김기설씨의 필적을 단순하게 비교하고 판단했다”면서 “판단근거로 제시된 유서 글자들의 특징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고 보기도 어렵고 일부 글자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고려하지도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 사건은 1991년 5월8일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이던 고(故) 김기설씨가 노태우 정권의 퇴진을 주장하며 반정부 투쟁 분위기를 확산시키려고 분신자살하자, 전민련 총무부장이었던 강씨가 김씨의 자살을 방조하고 유서를 대신 써준 혐의로 몰려 3년간 옥살이를 한 것에서 시작됐다.
검찰은 강씨가 김씨의 자살 생각을 알고 유서를 대신 작성해주며 분신자살을 하도록 방조했다고 봤다. 검찰은 같은 해 7월 강씨를 재판에 넘겼다. 그해 12월 1심 법원인 서울형사지법은 강씨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6월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1992년 7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3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한 강씨는 2007년 1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 규명 결정에 따라 재심을 청구했다.
2012년 10월 대법원에서 재심 개시 결정을 받아 서울고법에서 재심공판이 진행돼왔다. 재심에서 필적 감정 결과를 근거로 유서 대필 여부를 두고 검찰과 변호인은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는 1991년엔 유서에 적힌 글씨와 강씨의 글씨가 동일하다고 감정하며 검찰의 공소사실을 뒷받침했지만 2007년 과거사위원회의 의뢰에 따른 재감정에서 결론을 뒤집었다.
재판부는 다만 강씨가 1991년 8월 이적단체 가입과 이적표현물 소지(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추가 기소된 것에 대해서는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별도로 선고했다. 하지만 강씨가 이미 옥살이를 했으므로 다시 형을 살 필요는 없다.
양성희 기자 sunghe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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