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내가 기자가 됐다고 하자 어떤 여성이 "기자는 야한 직업이니 각별히 조심하라"는 말을 툭 던졌다. 왜냐고 묻자 그녀는 빙그레 웃기만 했고, 더 이상 캐묻지 못했다. 그저 '여자들이 기자를 좋아하는 걸까'하는 짐작에 내심 뿌듯해 했을 뿐이다.
착각이었다. 사전에 나오는 '천하게 아리땁다' 또는 '깊숙하지 못하고 되바라지다'는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걸 세월이 아주 많이 흐른 뒤 비로소 알게 된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착각 속에 살고 있다. 대표적인 게 "많이 안다"는 것이다. 출입처 한 곳을 몇 년씩 들락거리며 이런저런 기사를 쓰다보면 그 분야 전문가가 된 거 같은 자만에 빠지게 된다.
별거 아닌 기사에도 "어쩜 그렇게 많이 알고 계세요"하며 슬쩍 추임새 넣어주는 사람이 출입처마다 꼭 몇 명씩 있었다(그 분의 직급이나 직책이 높을수록 약발이 더 강하다). 무색무취 독약가루를 매일 먹는 음식에 솔솔 뿌려 멀쩡한 기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치명적 유혹(예전에 쓴 기사들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후안무치하고 구상유취한 글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 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등에서 땀방울이 돋는다).
송년 및 신년특집이라고 사정이 다를 리 없다. 평소 쓰는 기사보다 양이 더 많은 데다 특집이니 더 힘줘 써야 한다는 강박 탓에 증세가 더 심해지기 십상이다. 이때 궁여지책으로 출몰하는 단골손님이 진단, 또는 분석, 평가, 전망 등등의 꼬리가 따라붙는 각종 '전문가' 집단이다. 기사의 전문성과 함께 객관성과 형평성까지 겨냥한 다목적 포석인 셈인데 의도는 가상하지만 문제는 성공확률이 높지 않다는 데 있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전문가군(순 우리말로 쉽게 풀면 '그 밥에 그 나물')이 언론 수준을 끌어올리기보다 깎아먹기 일쑤인 탓이다. 그나마 성공이라면 '그 밥 그 나물' 가운데 몇몇이 언론에 이름을 올린 덕에 몸값도 불리고 자리도 높였다는 정도(이게 언론의 순기능일까? 역기능일까?).
그리하여 우리는 한 바퀴 빙 돌아 처음으로 되돌아가면 어떨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야(野')란 한자가 갖고 있는 본래의 뜻('들판' '민간ㆍ일반 백성들 사이' '성 밖ㆍ교외' '질박하고 꾸밈이 없는' '야생의' 등등)에 충실하면 어떨까. 들판으로, 백성들 사이로, 성 밖으로, 교외로 달려 나가 질박하고 꾸밈없는 그들의 목소리를 하나하나 핀셋으로 건져 올려 스토리로 엮어내면 어떨까. 기자는 '리포터(reporter)'니까. 르포(reportage)가 전문이니까.
<치우(恥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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