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강한 여인들이 몰려온다. 국립극단이 연말을 맞아 연극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과 '혜경궁 홍씨'를 무대에 올린다. 두 작품 모두 강인한 정신력과 생명력으로 혼란의 시대를 살아낸 여인들을 다룬다. 국립극단은 우리 삶의 원형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창작희곡레퍼토리로 두 작품을 선택했다.
◆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은 권력 다툼 속에도 시대와 장소를 넘어 여전히 살아있는 삶의 생명력에 관한 이야기다. 작품에는 나라를 새롭게 창업하고자 하는 도련님과 그의 군대, 화전민 여인들이 갈등의 주축을 이룬다. 도련님과 군대는 나라를 세운다는 미명하에 전쟁과 살상을 자행하고 노동 없이 먹을 것을 축내기에 바쁘다. 그러나 화전민 여인들은 극한 상황에서도 병사들을 먹이고, 씨종자를 나눠주며 다시 밭을 일군다.
작품은 상반된 남성과 여성, 두 삶을 통해 인간의 존엄한 생명력과 불변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개국신화'라는 허상과 위선 속에 가려진 가장 겸허한 진실은 바로 가족을 만들며 다음 세대의 미래를 내다보는 여성들의 진실하고 원초적 삶"이라는 것이 작품의 주제다. 여인들이 전쟁터를 훔친 이유는 죽음의 땅을 생명의 땅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은 김지훈 작가와 김광보 연출이 만난 것으로도 화제가 됐다.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거대한 담론을 펼쳐내는 것이 주특기인 김지훈 작가와 최소한의 것으로 본질을 드러내는 미니멀리스트 김광보 연출은 서로 상반된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번 작품은 원래의 대본을 반 이상 줄이며 공연 시간을 두 시간 내외로 만들어 극의 구조는 더욱 집약하고, 대사는 맛깔스럽게 펼쳐냈다.
나라를 세우려는 야망을 가진 젊은 도련님 역할은 귀족적인 마스크와 중저음의 목소리, 안정적인 연기력의 이승주가 전격 캐스팅됐다. 도련님에게 이용당하는 늙은 유자 역에는 오영수, 기회주의자 독선생 역할에는 김재건, 도련님의 거짓 개국신화를 만들어 내는 늙은 문관 역은 정태화가 맡았다. 국내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 중인 배우 길해연은 여인들 중 첫째 매지 역할을 맡았으며, 대한민국 대표 배우 이호재는 도련님의 반대세력, 대장군 역을 선보인다. 11월27일부터 12월8일까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 혜경궁 홍씨
'혜경궁 홍씨'는 국내 연극계의 거장 이윤택 연출이 작품을 맡았다. 작품은 혜경궁 홍씨의 기억을 따라 현실과 기억 저편의 경계를 넘나들며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만나 엉킨 실타래를 풀 듯 그녀의 삶을 되짚어 나간다. 특히 이윤택 연출가는 아버지에게 죽임 당한 사도세자의 아내로, 혜경궁 홍씨가 끔찍한 세월을 감내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바로 그녀의 비밀스러운 글쓰기 '한중록' 집필이었다고 본다. 작품은 철저히 혜경궁 홍씨의 입장에서 '한중록'을 따라 재구성한 대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은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가장 끔찍하고 비극적인 사건이다. '혜경궁 홍씨'는 이를 둘러싼 3대에 걸친 왕족의 역사를 한 가족의 일대기로 풀어낸다. 혜경궁 홍씨 역할은 관객과 평단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배우 김소희가 맡아, 자신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지만 여성으로서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혜경궁 홍씨의 복잡한 내면을 입체적으로 연기한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영조 역할은 연극계의 원로 전성환 배우가 맡았다. 비극의 주인공 사도세자는 최우성, 야먕이 넘치는 정조는 정태준 배우가 열연한다.
이번 작품는 전통 연희와 가무가 녹아있는 총체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극의 시작을 여는 혜경궁 홍씨의 진찬례에서는 궁중의례인 진찬연을 축약시켜 재현하며 종합예술로서의 연극의 진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12월14일부터 29일까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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