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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유안진의 '미완에게 바치는 완성의 제물'

시계아이콘읽는 시간36초

까마귀/울음 두 점 떨구고 간 된서리 하늘 아래/꽃필 가망 전혀 없는 구절초 봉오리/위에, 떡갈나무 잎 떨어졌다, 빗나갔다/또 한 잎 떨어졌다, 또 빗나갔다/다른 잎이 떨어져 반만 덮였다/또 다른 잎이 떨어져도 덜 덮였다/어디선가 한 잎 날아와 다 덮였다/도토리 빈 깍지, 저도 뛰어내렸다/바람 불어도 날아가지 않겠다.


유안진의 '미완에게 바치는 완성의 제물'


■ 이 시는, 끈질기게 바라보는 눈길이 시를 깊이 사무치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시들고 있는 구절초의 대머리 꽃봉오리에 눈을 준다. 까마귀 울음 두 점은, '까악까악'이다. 그 소리에 봉오리가 살짝 떨렸다. 늦가을 된서리까지 내려 구절초는 이미 춥다. 지금부터 이 '구절초 일병 구하기'의 우주적 대작전이 시작된다. 떡갈나무잎들은 저마다 꽃봉오리를 덮겠다고 나선다. 낙엽 하나 대머리꽃 위에서 팔랑거리더니 아쉽게도 비켜가고 만다. 떡갈나무는 또 한 잎을 떨어뜨렸으나 여전히 못 맞췄다. 그 다음 낙엽 하나가 용케도, 구절초를 반쯤 덮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을 덮는 일이 그리 쉬운 건 아니다. 다시 한 잎 두 잎 덤벼들어 겨우, 꽃봉오리가 포옥 덮였다. 그 덮인 위로 도토리 빈 깍지가 저도 거들겠다며 다시 내려앉는다. 시인은 그제야 눈을 거둔다. 꽃도 못 피운 봉오리 하나를 위해 이토록 우주가 힘을 합쳐 사랑을 베푸는 까닭은, 그 미완의 생명이 제대로 피운 꽃과 다름없이 똑같이 귀하기 때문이 아닐까. 오래 지켜보고난 뒤에야 숲세상의 아름다운 평등과 배려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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