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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유안진의 '어느 삼대'

시계아이콘읽는 시간34초

들깨 단을 머리에 인 할머니가/빈 달구지를 끌고 가는 암소를 뒤따르고 있다/새끼 밴 배가 땅에 끌릴 듯 처져 있다//개밥바라기 별 돋아난 하늘 밑에는/아직 불빛이 안 보인다


유안진의 '어느 삼대'


■ 가만히 읽다보면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할머니는 왜, 들깨 줄기를 모아 묶은 단을 달구지에 싣지 않고 머리에 이고 계실까. 이 궁금증이 생겨나야 할머니의 마음이 보인다. 달구지를 끄는 암소가 만삭이기 때문이다. 들깨 단 하나일 뿐이지만 그거라도 덜어주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을 읽어야, 암소가 왜 할머니보다 앞서서 가는지도 이해가 된다. 새끼 밴 배가 땅에 끌릴 듯 처져 있는 암소가 혹시나 탈이 날까봐 늘 걱정인 것이다. 시인은 짐승과 짐승의 새끼, 그리고 할머니를 '삼대'로 묶었다. 할머니에겐 이미 암소가 사람과 다름없으며 자식과도 진배없는 존재이다. 아니, 할머니 또한 늙은 소처럼 흙 위에서 부지런히 일을 해왔으니, 소들에겐 어미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삼대이든 짐승의 삼대이든, 셋은 부지런하고 충직한 노동으로 살아온 가족이다. 하늘에 별이 돋아나는 저녁이 되었는데도 할머니는 아직 집에 가지 못했다. 노쇠한 몸으로 일을 하다보니 느려질 수 밖에 없고, 귀가는 늦어질 수 밖에 없다. 하늘은 전등을 켰는데, 땅의 인가(人家)는 아직 불을 밝히지 못했다. 할머니 마음은 급하시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저 암소에게 여물을 주고 쉬게 하고 싶을 것이다. 혹시나 오늘 밤에라도 출산을 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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