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신범수 기자]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후 첫 출입기자 오찬간담회가 열린 지난달 31일은 며칠 비오다 모처럼 맑았다. 얼굴에 선크림 바르는 기자들이 꽤 많았다. 대통령과의 약속 장소인 '녹지원(綠地園, 경복궁의 뒷 정원이며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로도 쓰였음)'은 한정식집이 아니고 청와대 잔디밭이다. 햇살도 따가운데 본관 식당에서 하면 될 것을 굳이 왜 녹지원으로 정했을까 싶었지만 박 대통령은 하얗고 두꺼운 화장을 하고 12시 정각에 나타났다.
간담회는 기념사진 촬영으로 분위기 좋게 시작해 알맹이 없이 끝났다. "박 대통령은 100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다"는 것이 이날 우리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의 전부다. 굳이 하나 더하자면 '돼지를 한 번에 구으려면 코에다 플러그를 꽂으면 된다'는 것도 박 대통령 덕분에 처음 알았다. 얼굴이 탈까 두려웠던 기자들과 민낯을 보이기 싫었던 대통령은 그렇게 평화로운 100일을 타협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1970년대 어느 날을 기억했다. 밤에 초콜릿을 입힌 과자가 새로 개발됐는데, 당시로선 참으로 귀한 간식거리였을 법 싶다. 과자를 든 20대 박근혜는 출입기자들과 바로 이곳 녹지원에서 만났다. "우리 완전히 피크닉 온 것 같지 않아요?"라고 물었더니 한 기자가 "아니다. 우리의 피크닉은 (술을)먹고 쓰러져야 피크닉"이라 답했다고 한다. "여러분 술 너무 많이 드시지 마세요. 사고쳐요"라는 뼈있는 농담인가 싶어 쫑긋했지만 그냥 그게 다였다.
순간 멍해진 머리 속엔 1970년대 흑백 TV에서 봤던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하얀 앞치마에 머리쓰개를 한 알프스의 하이디가 바구니를 들고 들판을 노니는 모습, 40대 이상이면 다 아는 그 환상적인 장면 있지 않나. 그것의 청와대 판이라고나 할까.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는 고급스런 잔디밭에서 초콜릿(그것도 그 안에 밤이 들어있다는!)을 먹는 그들만의 '피크닉'이, 그나마 서울에 살아 남산타워 아래까지 갈 수 있었던 기자의 1970년대 '삶은 달걀 소풍'과 비슷한 시절의 일이란 게 마냥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40년이 지난 2013년 녹지원 풍경도 현실적이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기자와 대통령의 만남에 질문과 답이 오가지 못한 것처럼 비현실적인 게 또 어디 있으랴. 국민들은 하루 수백건씩 청와대 홈페이지에 질문을 올리는데 그들을 대신한다는 기자들은 피크닉의 환상에 빠져 버린 것일까. 기자회견이 아닌 비공개 간담회란 형식을 택한 것은 '취재보다 그냥 인사나 하자'는 뜻이다. 이런 결정에서 기자들은 '을(乙)'이기 때문에 책임을 묻자면 좀 억울한 면도 있다.
"박 대통령은 보여주기성 이벤트를 싫어한다"는 기사를 기자도 여러 번 썼다. 행사는 안 하더라고 보여줄 건 보여주라고 지적하지 못한 건 잘못이다. 윤창중 사건에 사과하라는 것은 사과로 끝내자는 게 아니라 사과부터 하고 시작하자는 뜻이었다고 더 강하게 말했어야 했다. 조용한 100일이 '겉치레보다 실속'이란 의미보다는 비판의 기회를 아예 차단하려는 것이란 의심은 기자만 품는 게 아니다. 어떻게 지났는지 알 수 없는 100일이 대통령과의 비현실적인 기념사진 한 장으로 남았다.
신범수 기자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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