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한 휴식과 감정노동 관리 프로그램 도입해야
[아시아경제 조은임 기자] "내가 니 친구가, 내가 니 밥이가. 아무 이유도 없이 내가 왜 니한테 욕을 들어야 하는데. 당신도 욕하는데 내라고 욕 못 합니까."
'대리운전 상담원 누나의 패기'. 두달 가까이 온라인 상에서 화제가 됐던 녹취록이다. 짧은 녹취록은 부산의 한 대리운전 여성 상담사가 술에 취해 욕설과 고성을 퍼붓는 고객에게 맞대응 하는 내용이다. 상담사는 마지막에 "신고하겠다"는 고객의 말에 "할 테면 해봐라, 나도 업무방해로 고소하겠다"고 응수한다.
네티즌들은 대부분 "통쾌하다", "대단하다" 등의 반응이다. 하지만 이 상담사처럼 고객의 행패에 맞서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A은행 대출영업부에서 2년 동안 텔레마케터로 근무했던 김수연(28ㆍ여) 씨는 "고객이 욕설을 하면 그냥 듣고 있거나 죄송하다고 말하고 끊는 게 전부였다"고 말했다.
◆목소리로만 영업, 고객 횡포에 노출되기 쉬워=전화로 각종 상품을 판매하거나 고객의 불만 사항을 접수하는 텔레마케터는 이른바 '얼굴 없는 감정노동자'다. 고객을 직접 대면하지 않다 보니 일부 고객들의 횡포에 노출되기가 쉽다. 몇 년 전 한 휴대전화 제조업체에서 전화로 기술지원을 담당했던 이제현(32ㆍ남) 씨는 "일단 불만을 갖고 전화하는 고객들을 대하는 게 힘들었다"며 "어딨냐고 물으면서 당장 찾아가겠다고 협박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말했다.
목소리로만 영업을 하다 보니 과도한 감정 조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업계에선 "미소가 섞인 말투"를 주문하기도 한다. 카드사에서 1년 동안 전화영업을 담당했던 고아현(27ㆍ여) 씨는 "많으면 A4 한 면에 꽉 찰 분량의 회원 서비스, 무이자 할부, 할인 가맹점 등 각종 혜택을 속사포로 읊어야 했다"면서 "이 때도 손님의 반응에 관계없이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는 필수였다"라고 말했다.
◆회사 내 감시와 열악한 근무환경도 문제=텔레마케터들의 감정노동을 배가 시키는 것은 철저한 감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2009년 발간한 '텔레마케터 인권 상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텔레마케팅은 '기업 이미지를 높이고 동시에 효율성을 개선시켜 기업 매출과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에서 도입된 경영 수단'으로 반대급부로 '실적강요에 따른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텔레마케터들의 업무는 대부분 녹취가 돼 인센티브나 승진에 반영된다. 고 씨는 "텔레마케터들의 업무 감시만 전담하는 부서가 따로 있었다"면서 "혜택 중 하나라도 빠지면 업무평가에서 감점을 당하니 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고 털어놨다. 인권위에서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한 공공기관에서는 첫인사, 끝인사, 양해멘트를 누락할 경우 상담원 평가 시 감점을 하기도 했다.
열악한 업무환경 역시 텔레마케터들의 고충을 가중시킨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텔레마케터의 월 평균 수입은 140만원이다. 주당 평균 업무시간은 43시간이지만 실적을 채우지 못해 연장근무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국내 한 대형 카드사는 텔레마케터들에게 한 시간 근무 후 10분간 휴식을 주도록 규정을 정해놓고 있지만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었다. 전화를 통해 가입에 응한 고객들의 등록 작업을 휴식시간에 하도록 지시하기 때문이다.
인권위는 작년 말 발간한 '감정 노동자의 인권수첩'을 통해 고객이 반말이나 욕설을 할 경우에는 통화를 정지하거나 매니저 및 전담팀으로 통화를 전달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고객이 성희롱에 해당하는 언어를 사용할 때는 우선 현행법 위반임을 알리도록 조언했다. 기업에게는 감정노동자들에 대해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고 물리치료나 심리치료 등 상시적인 감정노동 관리 프로그램을 도입할 것을 권유했다.
조은임 기자 goodn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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