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년역사의 스와로프스키...크리스털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켜
[아시아경제 박희준 기자]오스트리아 바텐스(Wattens).오스트리아 티롤주 인스부르크강에서 13km 정도 떨어진 인구 8000명이 안되는 조용한 소도시다. 알프스산맥의 가장 큰 줄기인 카르벤델 산맥 아래 있어 눈이 많은 곳이다.그래서 스키어들이 많이 찾아 관광업이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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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텐스에서 관광업이 발전한 이유는 또 있다. 이곳은 크리스털 산업의 제왕인 스와로프스키의 본향이자 수많은 매장이 있기 때문이다. 스와로프스키 공장 앞에 있는 창사 100주년 기념관이자 테마파크인 ‘크리스털 월드’는 해마다 수 백 만 명이 찾는 명소다..
바텐스의 폐공장에서 시작한 스와로프스키는 12개의 자회사와 3만1458명의 종업원,전세계 1218개 매장과 제휴사 부티크 1000곳,8개국에 생산시설을 두고 28억7000만 유로(한화 약 4조23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거대한 그룹으로 성장했다. 매출의 약 77.4%는 크리스털 비즈니스에서 올린다.
스와로프스키는 크리스털 귀걸이와 목걸이,팔찌 등 주얼리와 샹들리에,보석,액세서리,망원경,선글래스와 시계,소총,조준경,연마기계,다이아몬드톱 및 레이저용접기구 등 다양한 소비재와 공구를 생산하고 있다. 스와로프스키가 생산하는 크리스털은 조지아르마니와 빅토리아시크릿 등 최고급 브랜드 제품 의류에 부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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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 출신의 유리 크리스털 장인 다니엘 스와로프스키가 118년전에 세운 기업은 냉장와 TV 등 가전제품에서부터 이어폰 등 IT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이라면 모두 필요로 하고 패션 디자이너들이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있으며 크리스털 매니아들이 신제품을 설레이며 기다리는 그런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다니엘은 매제인 프란츠 바이스와 절친이자 금융가인 아르몬드 코스만과 함께 1895년 3년전 개발을 완료한 자동 크리스털 절삭연마기계로 인조 크리스털을 생산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
산이 높아 광물자원이 풍부한 보헤미아는 예로부터 유리와 크리스털 공예가 발전한 곳이었다.다니엘의 아버지도 유리.크리스털 공방을 운영했다. 아버지 밑에서 도제로 일하면서 유리와 크리스털 절삭과 미세가공 기술을 배운 다니엘은 21살이 다 끝날 무렵인 1883년 빈에서 열린 국제전기박람회에서 에디슨 등 당대 최고의 발명가들이 출품한 산업기계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크리스털 절삭기계를 개발하기로 결심하고 9년을 쏟은 끝에 개발에 성공해 특허를 등록할 준비가 됐다.이 기계 덕분에 사상 처음으로 크리스털을 흠하나 없이 깨끗하게 절단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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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알프스산의 풍부한 수력을 이용할 수 있고 경쟁사에 기술을 빼앗길 염려가 없으며 파리라는 넓은 패션 소비시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최적의 공장입지로 티롤주의 촌구석 바텐스를 골라 1895년 10월1일 이주했다.
1907년에는 수력발전소를 세웠다. 1908년에는 빌헬름,프리드리히,알프레드 등 세아들도 집에 바로 붙은 공장에 합류했다. 다니엘은 3년뒤 자체 수정 용해로를 설계해서 설치했다.수많은 실패 끝에 1913년에는 티하나 없는 무결점 크리스털 생산에 성공했다.이 시기는 스와로프스키가 크리스털 대량생산에 들어간 이정표로 평가된다.
$pos="C";$title="다니엘이 자체 개발한 기계로 크리스털을 제작하는 모습";$txt="다니엘이 자체 개발한 기계로 크리스털을 절삭연마하는 모습";$size="458,301,0";$no="201304191128082325273A_1.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
스와로프스키 부자가 만든 크리스털은 모래와 소다,산화납이라는 원료로 만든 인조크리스털이지만 원료의 배합과 가열시간은 아직까지 비밀로 남아 있다. 액체상태의 크리스털이 굳으면 다니엘은 자기가 고안한 기계로 최대 100면까지 커팅해 영롱한 빛을 사방으로 반사하게 했다. 당시 경쟁업체들은 12개 안팎의 커팅면을 가졌지만 스와로프스키 크리스털은 평균 28면의 커팅면을 가졌다.여기에 특수 금속코팅을한다음 윤을 내 마감한다. 스와로프스키 부자나 그 후손들에게 반짝인다고 해서 다 크리스털은 아니라는 자부심이 생긴 원천이다.
$pos="C";$title="스와로프스키가 생산한 크리스털 꽃 포인세티아";$txt="스와로프스키가 생산한 크리스털 꽃 포인세티아";$size="510,466,0";$no="201304191118542228587A_1.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
스와로프스키의 장수의 다른 비결로는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고 시장의 흐름에 맞춰 신제품을 내놓는 창의성 DNA가 꼽힌다.
1차 세계 대전이 터져 절삭기 부품과 크리스털 원석이 부족해지자 다니엘은 2년간의 연구 끝에 숫돌바퀴와 크리스털 절삭에 쓰이는 드레싱 도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1919년에는 ‘티롤리트’(Tyrolit)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했다.티롤리트는 다이아몬드 톱과 드릴링,드레싱 공구와 기계를 생산했다.
그는 1925년 반사경을 시험해 25년 뒤에 스와리플레스라는 자회사 출범의 기초를 마련했고 1931년에는 크리스털 부스러기를 박은 봉제용 리본 트리밍을 출시했다. 아들 빌헬름은 1935년 쌍안경 시제품을 만들어 훗날 스와포스키 오프틱 프로덕츠가 각종 쌍안경과 소총 조준경으로 명성을 날리는 기초를 놓았다.
1956년에 경영을 맡은 손자 만프레드는 패션업체 크리스찬 디오르와 협력해 진공기화법을 이용해 크리스털에 무지개 빛 광채를 더하는 ‘오로라 보레알리스’ 기술을 개발해 크리스털 액세서리 시장을 크게 확장시켜 격찬을 받았다. 1975년에는 열접착으로 크리스털을 다른 재료에 붙이는 핫픽스(Hot Fix) 기술도 개발했다.
그는 또 1970년대 후반 세계를 강타한 오일쇼크로 매출이 급락할 때 소비재 사업에 과감히 뛰어들었다.그는 사무실에 앉아 매출신장을 방법을 골똘히 생각하다 크리스털을 나열했다.신기하게도 생쥐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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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녀이자 부사장인 나디야 스와로스프키는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할아버지는 이 때영감을 받았다”고 술회했다.이것이 계기가 돼 스와로프스키는 1976년 인스부르크 동계올림픽에 맞춰 ‘크리스털 미키마우스 모형’을 출시해 대박을 터뜨렸다.이후 백조모형 등 크리스털 동물 모형,꽃 등 수많은 제품을 생산해 1987년에는 마니아들의 모임인 스와로프스키 크리스털 협회(SCS)가 설립됐다.
1988년에는 회사 상징을 에델바이스에서 순결하면서도 우아하고 깨끗한 백조로 바꾸었다.
또 1993년에는 크리스털이 촘촘히 박힌 크시털 매쉬(Cristal Mesh)를 출시했고 2003년에는 직물에 작은 크리스털을 뿌려 섬세하고 은은한 표과를 내는 크리스털 패브릭(Cristal Fabic)을 개발했다. 또 2003년에는 단면의 배열을 변화시켜 빛을 굴절을 개선해 더 많은 광채를 얻는 씰리온(Xilion)을 개발했다.
신기술개발과 신제품 출시는 자회사 신설로 이어져 스와로프스키 옵틱,티롤릿,스와리플렉스 등 12개 기업으로 늘어나고 자회사들은 국내외로 뻗어나갔다.
1995년는 세계 톱 디자이너이자 현손(5대손)인 나디야(43)가 가족기업에 합류해 유명 디자이너와 손잡고 ‘디자인 혁신’을 일으키면서 스와로프스키는 크리스털 동물 모형을 만드는 저급한 ‘키치’(Kitch) 수준 회사에서 글로벌 ‘오트쿠튀르’(고급품)으로 회사의 반열에 올랐다.
스와르프스키가 성공한 다른 비결은 가족경영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다니엘은 세아들에게 지분을 정확히 3등분해서 배분했다.지분은 가족내에서 거래하고 후대에 공평하게 분배한다는 원칙을 만들었다. 가족 경영은 핵심 원천 기술유출을 막겠다는 다니엘의 강한 의지가 반영됐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 특정 구성원이 절대권력을 갖지 못하는 체제도 만들었다. 회장은 8명의 이사회가 멤버가 정한다.100여명의 후손들은 지분을 나눠 갖고 회사를 소유하고 있는데 현재 5세대가 경영전반에 포진해 있다.
현재 21%의 지분을 보유해 최대 주주인 다니엘의 외증손자인 게르노트 랑게스 스와로프스키(69)의 아들이 일상의 경영을 맡고 있다.그러나 경영전략에서는 그가 가문을 대표해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2002년까지 35년간 회사 얼굴 노릇을 한 그는 가족주주를 대표해 자문위원회에 남아서 회사경영전략에 영향을 주고 있다.
비상장 가족경영은 폐쇄적 족벌 독단 경영이라는 비판을 받기 쉽지만 스와로프스키가 생산하는 투명한 크리스털처럼 순기능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단기 성장주의에 집착해서 숙련기술을 보유한 장인의 양성과 창의력 개발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상장기업과 달리 강력한 주인의식을 가진 경영자의 지휘하래 장기성장의 발판 구실을 했다.
$pos="C";$title="뒤로 알프스산 지맥을 두고 있는 스와로프스키 본사";$txt="뒤로 알프스산 지맥을 두고 있는 스와로프스키 본사";$size="510,322,0";$no="201304191126342305061A_1.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
게르노트 랑게스는 2010년 발표한 ‘지속가능성 보고서’에서 “가족회사들은 우리 경제와 사회체제의 품질보증서였으며 현재도 그렇다”면서 “유연한 구조 덕분에 우리는 다른 기업 형태보다 경계하고 혁신하며,신속하다”고 자평했다.
와인 애호가인 게르노트 랑게스는 1989년 아르헨티나 멘도사 지역에 1200헥타르 규모의 와이너리를 매수했고,10년 뒤에는 3000만달러의 개발비를 들여 중국 창리에 200헥타르 규모의 보데가 랑게스 포도원을 만들었고 2010년에는 1억2200만 달러를 들여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버논시에 스파클링 힐 리조트를 개원하는 등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스와로프스키그룹은 한 위대한 혁신가와 그가 시작한 창의와 혁신기술, 그것을 전승하는 가족기업이 가문은 물론, 지역과 국가 경제를 살찌우는 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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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준 기자 jack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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