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메뉴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서울스토리]왕과 백성이 함께 일, 밥, 기원을 나누던 자리, '선농단'

수정 2013.05.27 16:28입력 2013.03.22 10:56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선농단 보존회'와 제기동 주민은 매년 곡우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례를 올린다. 선농제는 신라 때 시작돼 고려와 조선으로 계승됐다.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의 주택가 한 가운데 측백나무와 향나무가 작은 숲을 이룬 공원이 있다. 공원이라고 하기에는 철책이 휘감고 있는 '금역'의 공간이다. '폐쇄된 공원'. 공원을 막고 선 것은 철책만이 아니다. 주변에 재개발 아파트가 속속 들어서고 , 서로 이마를 맞대고 있는 다가구주택들이 다시 한번 휘감고 있다. 공원은 철책과 주택으로 이중 포위돼 찾기도 어렵다. 바로 '선농단'으로 풍년을 기원하는 제례 장소다.


선농단은 전체 1000여평 규모로 일부는 어린이 놀이터다. 선농단은 오늘날 농업의 몰락을 대변하는 듯 손 본 흔적이 거의 없다. 그나마 매년 곡우(4월20일) 때 제기동 주민과 '선농단 보존회'가 제사를 올리고 풍년을 기원하는 공간으로 쓰인다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오늘날 농업이 박해받는 현실에서 더 이상 숭상해야할 의미를 잃었다고는 하나 선농단의 방치는 역사에 대한 무관심 그 이상으로 비춰진다.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의 주택가 한 가운데 위치한 선농단은 조선 성종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각형의 벽돌담 안에 두개의 기단이 두고 있으나 정확한 고증을 통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일제 이후 폐쇄됐다가 지난 79년 복원될 당시 만족할만한 자료를 찾아내지 못한 까닭이다.
 
직사각형을 이룬 공원의 남쪽 철문을 들어선 다음 측백 나무 사이를 대각선으로 70여 m 가량 걸어가면 공원 동북편 모서리에 작은 제단이 나온다. 제를 올리는 곳이다. 제단은 높이 70여cm, 폭 50여cm 규모의 정사각형 형태의 벽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벽돌담은 각 면의 중앙을 터 제단 안쪽으로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벽돌담 안쪽에는 화강암으로 축대가 쌓여 있고 다시 중앙에 단이 만들어져 있다. 선농단의 중심부의 모습이다.

이곳 선농단은 조선 고종이 1904∼1907년 황실제도정리국을 설치, 왕실 재산을 정리할 당시 선잠단과 선농단을 사직단으로 통합하면서 폐쇄됐다. 1908년 일제는 한술 더 떠 국토의 소유권을 조사, 황실 재산을 국유화하는 과정에서 선농대례마저 완전히 없애 버렸다.


선농제는 1979년 제기동 주민들이 '선농단 보존회'를 꾸려 복원함으로써 동대문 지역의 전통 제례행사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농업이 산업의 근본였던 시절 왕과 백성이 한 마음으로 제를 올리고, 함께 들에 나가 일하고, 밥을 지어 나눠먹으며 풍년을 기원했던 미풍은 역사의 질곡을 거치는 동안 지역문화로 전락한 셈이다.

복원 당시 선농단 보존회와 제기동 주민은 여러 고증 과정에서 만족할만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 했다. 따라서 현재의 제단, 제례 등이 예전 그대로 복원됐는지는 확실 치 않다. 제단 형태나 제례 의식과 관련한 자료가 유실됐기 때문이다. 보존회 등이 여러 문헌을 참고해 선농대제를 치루는 것으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정도다.


문화재청도 2001년 선농단을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면서 주민들이 복원한 벽돌담과 돌축대의 보존 여부를 놓고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것마저 문화 유산이고, 주민들이 새로 복원한 선농제의 정신을 유지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현재의 선농단은 조선 성종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75년(성종 6년) 관경대(觀耕臺)를 선농단 남쪽 10보 밖에 쌓고 왕이 친히 선농단에 제사를 지내고 밭을 갈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미 선농단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선농단 공원은 주변 주택가 등 주변 지형보다 2m 정도 높은 구릉지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제단으로부터 열댓 걸음 남쪽으로 걸어오면 수령 500여년 된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성종이 관경대를 쌓느라 만들어낸 지형이 아닌가 추정된다.


선농의 기원은 신라 때부터다. 고려 성종 2년(983년) 왕이 몸소 밭을 갈며 신농에게 제사하고 후직을 배향(配享)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선농 의식은 조선 태조에게 이어져 왕들이 친히 밭을 경작하고 농경을 장려했다. 헌데 제례의 대상은 중국의 신농씨와 후직씨다.


여기서 잠시 이국의 조상을 신으로 모셔진 것에 아쉬움이 들기는 한다. 혹자는 불교나 기독교 등 외래 종교를 수용하고, 성탄절을 성대하게 보내는 마당에 굳이 따질 거 있느냐는 의견이다. 하여간 유목민족인 우리 조상들이 한반도에 정착, 농경문화를 꽃 피워온 이래 농업 장려와 기원, 의식은 전통적인 관습였음은 분명하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선농단의 제의식은 진설(陣設)ㆍ전폐(奠幣)ㆍ궤향(饋享)ㆍ경적(耕籍)으로 나누어진다. 진설은 향사 3일 전에 왕이 거처하는 장막을 설치하는 등 제사 준비 과정이다. 전폐는 제의집전관이 제사상을 차린 뒤에 제복을 갖춰 입고 올라와 신농씨와 후직씨의 신위판(神位版)을 신좌에 모시는 의식이다. 궤향은 왕이 폐백(幣帛)을 드리는 의식이다. 경적은 왕과 종친 및 신하들이 쟁기를 잡는 의식으로 파종을 하는 것을 말한다. 


왕들은 제례와 친경을 마치고 소 한마리로 탕을 끓여 백성들과 나눴다.이를 '선농탕'으로 불렀으며 오늘날 '설렁탕'의 유래다. 지금도 제기동 주민들은 제를 지낸 후 1000여 그릇의 탕을 끓여 나눠먹고 있다.

 
이에 동대문구는 선농단을 역사체험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총사업비 67억7300만원을 들여 '선농단 역사유적 정비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구는 지난해 실시한 설계공모를 토대로 오는 5월 선농단 복합문화공원 조성공사를 착공해 12월 말 완공할 예정이다. 어린이 놀이터 하단에는 전시설 및 역사자료관 등을 포함한 휴게공간 등을 조성한다.


역사공원 완공 후엔 공원을 두른 철책이 없애고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된다. 당연히 어린이 놀이터는 사라진다. 일부 주민들은 어린이 놀이터가 사라지는 걸 아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대문구 문화재 관련 담당 공무원인 이준구씨는 "도시계획 상 역사공원 등 문화재 공간에는 주민편의시설의 설치가 어렵고 주택 밀집지역에 위치, 공간이 협소해 부득이한 결정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대신 역사자료관을 어린이 공부방 등 휴게공간으로 제공한다고 덧붙였다.


새로 조성되는 전시실에는 농업박물관 등에서 기증받은 농기구, 농산물 등이 전시되고, 농업진흥청과도 협의해 농사의 변천과정과 각종 농작물 표본을 전시할 계획이다. 선농단 관련 제복 및 제기, 선농대제의 모습 등 각종 친경 의식, 선농단 관련 문화재 등도 수집, 전시된다. 이씨는 "선농대제 재현을 통해 역사교육 공간으로 조성, 농경문화 체험교실 및 음식문화 프로그램 등도 운영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대문구는 선농단 복합문화공원과 함께 건립하는 선농단역사관에 친환경ㆍ재생에너지(지열)를 적용하고 우물관정형 공법을 도입할 계획이다.


우리 농업은 수십년 동안 진행된 살농정책과 외국 농산물 수입 등으로 몰락 직전이다. 식량 자급률이 20% 수준에 머물러 안보마저도 위협받는 상황이다. 선농단과 선농대제가 그저 지역 정체성을 살리고 지역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전통 관습 정도로 남겨 두기에는 농업의 의미는 막중하다. 선농단이 역사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농업에 대한 관심도 깊어지길 기대해 본다.




이규성 기자 peace@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댓글 SNS공유 스크랩

오늘의 토픽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