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북한이 국제사회의 거듭된 만류에도 12일 핵실험을 강행했다. 지난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후 본격적으로 추진한 핵무기 개발이 마무리에 접어들었다는 신호다.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20여년간 이어진 강온국면에서도 북한이 지속적으로 핵무기 보유 의지를 거두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 만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대북정책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가능성이 커졌다.
90년대 초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 결과에 대해 미국이 이의를 제기하자 북한은 NPT 탈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듬해 열린 북미간 제네바합의를 통해 북한은 경수로를 제공받고 원자로 건설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뒤이어 들어선 김대중 정부 역시 미국과 함께 북한에 대해 로켓발사를 중단하면 대북경제제재를 해제한다는 내용의 '페리 프로세스'를 추진했다.
이후 북핵시설 사찰문제와 함께 지하핵시설에 대한 의혹이 거론되면서 온건 국면은 깨졌다. 2000년대 들어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자 북한은 미 특사자격으로 방북한 제임스 켈리에게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북미간 갈등이 고조되면서 결국 북한은 NPT를 탈퇴, 북핵위기가 불거졌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다자협상 체제, 6자회담이 도입됐다. 북한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국을 비롯해 일본, 러시아까지 끌어들여 외교를 통해 북핵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2005년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무기 포기'라는 9ㆍ19 공동성명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듬해 바로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했고 이에 대해 안보리에서 대북제재 결의안이 나오자 세달 가까이 지난 그해 10월 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극단적인 선택 후에는 일시적 소강국면에 접어들기도 했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간 정상회담이 열렸으며 북미간 협상도 진전되는 듯보였다. 그러나 물밑에선 꾸준히 핵개발을 이어갔다. 오바마 대통령이 처음 취임한 2009년 2차 핵실험에 이어 2기 행정부 출범에 맞춰 3차 핵실험을 강행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와 어떤 상황에서도 핵무장 욕심을 꺾지 않은 셈이다. 핵개발과 병행해 이를 실어나를 수 있는 로켓기술도 꾸준히 연구, 한반도 주변은 물론 미국에게도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위협을 통해 협상과정에서 더 많은 걸 얻어내려는 의도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6자회담 대표와 국가정보원 1차장을 지낸 이수혁 씨는 2011년 '북한은 현실이다'라는 책에서 "돌이켜보니 북한은 애초부터 핵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며 북한이 향후에도 핵 보유로 갈 것으로 내다봤다. 그의 분석이 이번 3차 핵실험으로 확인된 셈이다.
통일연구원 전현준 북한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은 "대량살상무기를 갖춰 체제 및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책"이라며 "김정일의 유훈관철, 군사적 우위 과시, 대미협상수단 등 외부적으로 무력공격을 막겠다는 의도와 함께 내부적으로는 주민통합을 위한다는 복합적인 의도"라고 설명했다.
최대열 기자 dy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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