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사와 동철을 만난 며칠 후, 하림은 혜경이 미장원으로 갔다.
그날 동묘 앞에서 일차를 하고나서 홍대 부근으로 이차를 가자고 하여, 택시를 타고 윤여사가 자기 아는 후배라며 자기랑 분위기가 닮은 여자가 하고 있는 카페로 가서 양주를 마신 것은 알지만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소주 마신 데에 엎어서 마신 술이라 양주 몇 잔에 맛이 갔는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깨어나 보니 자기의 유일한 아지트인 망원동 원룸이었고, 주머니엔 열쇠가 하나 들어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날 윤여사가 고향집 자기 작업실 열쇠라며 손에 쥐어준 바로 그 열쇠였다.
그러니까, 자기가 그녀의 제의를 받아들여 오케이했다는 말이었다. 또 그러니까, 누렁이 개 두 마리, 여름이와 가을이라 했던가, 암튼 두 마리 토종개가 불쌍하고도 비참하게 남의 엽총에 맞아 생을 마감한 그곳으로 찾아가 몇 달인가를 지내면서 돌아가는 마을 분위기도 좀 알아보고, 겸하여 윤여사 고모할머니도 위로하고, 겸하여 그런 몹쓸 짓을 한 인간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겸하여 누구인지 알았으면 장차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판단하여 윤여사에게 보고해주는 일을 자기가 맡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술자리를 건너뛰는 동안 그렇게 결정이 되었다는 것을 열쇠는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주머니에는 그날 혜경에게 주려고 샀던 노란 털장갑 한 켤레가 얌전하게 들어있었다. 열쇠보다도 그게 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이 깬 하림은 문방구에 들러 포장지와 카드를 한장 골라 샀다.
선물이란 원래 내용도 중요하지만 주는 사람의 정성이 더 중요한 법이다. 같은 선물이라도 어떻게 포장하는냐, 에 따라 그 효과는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선물 전달하는 타이밍도 잘 맞추어야 한다. 받는 사람의 기분이 어떨 때냐, 화가 나 있을 때냐, 모든 게 귀찮을 때냐, 아니면 우울하지만 여유있을 때냐, 에 따라 그 효과 역시 전혀 달라진다.
하림은 먼저 카드에다 뭘 쓸까,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김춘수 시인의 '꽃'도 좋았지만 너무 많이 써먹어서 진부했다. 쌩 떽쥐베리의 '인간의 대지'에 나오는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는 말도 좋았지만, 이 나이에 그런 말을 쓰자니 왠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자기가 몸소 그럴듯한 시 한편을 쓰면 어떨까. 삼류 시인이긴 했지만, 자기도 어쨌거나 시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사는 사람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혜경아, 사랑해! 하림이가.’
라고 썼다.
아무런 수식도, 아무런 장식도 없는 그 한 마디.
그렇게 쓰고 보니 가슴 한쪽이 자기도 모르게 무너지듯 울컥해지는 것이었다. 공연히 콧등까지 시큼해졌다. 아무리, 아무리 써도 닮지 않는 그 한 마디. 그 말만큼 많는 사연들이 녹아있고, 그 말만큼 단순명료 애절한 말이 이 세상이 또 어디 있을까. 카드에 그렇게 쓰는 동안 하림의 가슴에도 무수한 추억들이 물보라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하림은 붉은 별들이 무수히 박힌 반짝거리는 은박지 포장지에 ‘혜경아, 사랑해! 하림이가.’ 라고 쓴 카드와 함께 노란 장갑을 정성껏 싸고 테이프를 붙였다. 그리고 가장 멋진 순간에 가장 멋있는 포즈로 그것을 혜경에게 전해주리라 생각하며 길을 나섰던 것이다.
글 김영현/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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