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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장 동묘(東廟) 부근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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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장 동묘(東廟) 부근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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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할까....?’
하림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혜경이 줄려고 산 노란 털장갑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노느니 염불이라고 하긴 딱히 할 일도 없는 요즘이었다. 학원 문이 닫히고 나자 졸지에 백수 아닌 백수 신세가 되고만 터였다. 동철이 미리 그걸 알고 자기에게 전화를 걸어 윤여사에게 추천한 것인지도 몰랐다.


특별히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다. 동철의 말대로라면 윤여사의 고향 마을에 내려가 한두 달 쉬다가 오면 되는,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 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돈까지 주겠다는 게 아닌가.
지나가는 말이었을 테지만 동철이, ‘쓰고 싶은 글이나 쓰면서....’ 하는 말도 마음에 와 닿았다. 아닌 말로 요즘 같이 어수선한 시기에 어딘가에 푹 묻혀 모든 걸 잊고, 쓰고 싶었던 글이나 쓰면서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을 때였다. 혜경이가 마음에 걸렸지만 자기가 옆에 붙어있다고 하여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아니, 이 기회에 조금 떨어져서 자기들의 뜨뜻미지근한 관계에 대해 근본적인 구상을 해보는 것도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때요? 가주실 거죠?”
윤여사가 채근이라도 하듯 말했다. 하림은 대답 대신 술잔을 들어 바닥이 보이도록 털어놓은 다음, 안주를 집었다.


그러죠, 라고 하고 싶었지만 선뜻 그 말이 입 밖으론 나오지 않았다. 혜경이 곁에 조금 더 자주 있어주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요즘 들어 부쩍 더 힘들어하는 것 같았는데...... 은하랑도 학원 그만 두고 노는 동안 겨우 좀 친해지고 있던 참이었다.


“참, 죽은 누렁이의 이름이 여름이와 가을이래요.”
그때 윤여사가 생각난 듯이 덧붙였다.
“여름이와 가을이.....?”
“예. 남맨데 누나 개가 여름이고 남동생 개가 가을이래요. 고모할머니가 그렇게 붙여주셨대요. 후후. 재미있죠?”


윤여사가 두툼한 입술을 비틀며 하림을 보고 웃었다.
여름이와 가을이..... 하림은 가만히 혼자서 되뇌어보았다.
이름이란 얼마나 이상한가. 이름을 갖기 전에는 하나의 사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이름을 갖는 순간 인격을 가지게 된다. 그러니까 죽은 놈은 누렁이나, 똥개 두 마리가 아니라 엄연히 여름이와 가을이라는 이름을 가진, 말하자면 인격적 존재였다는 뜻이다.


그리고보니 느낌이 달랐다. 처음에 개 두 마리, 그것도 누렁이 똥개 두 마리라고 했을 땐 그저 개가 죽었나 보다 했는데, 여름이와 가을이가 죽었어요, 했을 땐 분명 달랐다. 격이 달라졌고, 의미가 달라졌다. 어느 나라에선 개가 억만장자의 상속자로 등록되어 유산을 물려받을 것이라거나, 강아지와 결혼식을 올린다거나 하는 믿지 못할 외신과 같진 않더라도 여름이, 가을이 하고 이름이 붙는 순간, 확연히 달라지는 느낌이 있었다. 누렁이나 똥개 두 마리가 엽총에 맞아 죽었다면 그렇거니, 개죽음이겠거니,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름이와 가을이가 엽총에 맞아주었다면 그건 보통 일이 아닐 거란 느낌이었다.


예전에 읽었던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가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런 시였다.
연애 시절에 누구나 한번쯤은 인용하곤 하던 시였다.


이름이란 똑 같은 것을 그렇게 달라보이게 하는 마법을 가지고 있었다.






글 김영현/그림 박건웅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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