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고형광 기자] 1년 전 이맘때 홍콩 시내의 한 카페. 한 외국인이 한국에서 출장온 국세청 직원에게 서류봉투 하나를 건넨다. 서류 안에는 국내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A씨(한국인)의 홍콩 비밀 계좌와 금융 거래 내역이 상세히 들어 있었다.
서류를 넘겨받은 국세청 직원은 한국으로 돌아와 동료들과 A씨의 금융 거래 내역을 꼼꼼히 살폈고, 그 거래 내역을 바탕으로 A씨가 해외에서 1000억원대의 소득을 탈루한 혐의를 입증해 냈다. 며칠 뒤 국세청은 A씨에게 해외에서 소득을 탈루한 이른바 '역외(域外) 탈세' 혐의를 적용해 200억원이 넘는 세금을 추징했다.
당시 카페에서 국세청 직원과 접선한 외국인은 다름 아닌 외국계 사설탐정이었고, 국세청은 자료를 넘겨 받는 댓가로 그에게 수만달러를 지불했다. 물론 이 거래에 영수증은 오가지 않았다. 음성적 거래에 영수증을 요구한다는 자체가 코미디다.
국세청이 지불한 돈 또한 영수증 첨부가 필요 없는 '특수활동비' 중 일부였다. 특수활동비란 정부 예산 중 정보 수집활동 등 영수증을 요구하기 곤란한 곳에 사용하는 경비를 말하며, 국세청엔 지난해 처음 배정됐다. 특수활동비 덕에 A씨의 탈루 혐의가 입증된 셈이다.
올해 A씨와 같은 역외 탈세자들에 대한 조사가 대폭 강화될 전망이다. 국세청의 특수활동비가 대폭 늘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소득을 탈루했거나 해외에 재산을 숨겨둔 탈세자들의 계좌 정보를 수집하는 데 필요한 과세당국의 힘(특수활동비)이 그 만큼 더 충전된 것이다.
21일 국세청에 따르면 올해 국세청의 역외탈세 관련 예산은 총 79억원으로 여기에는 특수활동비 45억6000만원, 해외체류비 22억원, 특정업무경비 11억원, 업무추진비 4000만원 등이 포함됐다.
이 중 특수활동비(45억6000만원)는 전년 규모(20억원)와 비교해 2.3배로 늘었고, 역외탈세 전체 예산의 절반이 넘을 정도로 비중이 커졌다. 올해 특수활동비가 증액된 부처는 국세청이 유일하다. 국가정보원을 포함해 다른 부처들의 특수활동비는 대부분 동결 내지 2~10% 가량 축소됐다.
국세청 관계자는 "지난해 말 국회 예산심의 과정에서 국세청 특수활동비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고, 이 예산은 늘릴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고 전했다.
국세청의 역외탈세 조사가 외부에서 인정을 받을 정도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국세청이 지난 2011년 역외 탈세에 대한 조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 최근 2년간 이들에게 추징한 세금은 2조원에 이른다. 빠듯한 예산과 어려운 경제 여건 상황임을 감안하면 괄목할 만한 성적이다.
다만 국세청 입장에서 현재 특수활동비가 만족할 규모는 아니다. 지난 2008년 독일 비밀정보국이 자국 탈세자들의 명단과 그 내역을 입수하는 데 500만유로(약 70억원)를 지불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현재의 예산 규모로는 고급정보를 알아내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 국세청의 입장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역외탈세 예산이 1 정도 늘었다 가정하면, 추징 세액은 최소 10~20, 많게는 100 이상 늘어날 수 있다"고 전했다.
국세청은 증액된 예산을 국내에 거처를 두고 해외에서 소득을 탈루하고 있는 역외 탈세자들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 집중 사용할 계획이다.
고형광 기자 kohk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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